1984년 경기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고종 때 내시로 지극히 헌신하다 물러난 김병호는 임금의 하사금으로 1893년(고종 30)에 향리에 살림집을 지었다. 야산이 둘러싸고 있어 아늑한 형국을 이룬 터전에 ㄱ자형 안채가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ㄴ자형 사랑채가 맞은편에 있어 전체의 윤곽은 트인 ㅁ자형이다. 충청남도 북부에서 경기도 일원에 분포된 보편적인 살림집의 유형을 따르고 있다.
사랑채는 문간채와 창고가 함께 건축되었는데 일부에 변형이 있어 당초의 모습을 잃었다. 남향한 문의 향좌측에 바깥으로 퇴가 면한 사랑방이 있고 향우측에도 역시 바깥으로 퇴가 열린 정면 2칸 반의 방이 있는데 문에서 꺾이면서 동향을 하였다. 창고는 그 다음 칸에서 계속되며 1칸반통의 1칸 반과 1칸 규모가 연속되었다. 안채는 아주 정중하며 격조를 갖추고 있다.
문에서 들어서면서 마당 건너 마주 보이는 위치에 2칸 부엌이 있는데 간반통(間半通)이다. 이어 안방이다. 간반통의 2칸이다. 안방 다음이 대청인데 ㄱ자로 꺽이면서 시작되는 구조이다. 역시 간반통의 2칸인데 앞퇴를 개방하면서 고주에 문얼굴을 드리고 사분합(四分閤:문짝이 넷으로 되어 열리고 닫히는 문)을 달았다. 개폐가 용이하며 필요하면 열어 매달 수 있게 된 분합문이다.
문인방 위에 교창이 달렸다. 이는 건넌방 다음에 있는 마루에서도 동일하게 조성된다. 건넌방은 간반을 다 차지하였고, 마루 1칸 다음에 1칸의 정실(淨室)을 만들고 벽감(壁龕:벽을 파고 만든 감실)을 설치하였다. 사당을 따로 짓는 대신에 여기에 위패를 모실 수 있게 마련하였다. 부엌의 판벽과 널문, 부뚜막 가까운 위치의 광창, 부엌 위의 다락과 조명을 위한 광창, 정실 바깥벽을 반담쌓기 한 점 등은 고급스럽다.
선자서까래를 제대로 조성하고 정실쪽의 지붕을 팔작(八作:네 귀에 추녀를 달음)으로 하면서 부엌쪽을 맞배지붕으로 구조한 점 등은 집 지은 대목이 상당한 능력을 구비한 인물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