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당의 난은 1173년(명종 3) 8월에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김보당 등 문신 계열이 동계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김보당은 무신 정변 이후, 공부시랑과 간의대부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그의 반란은 무신 정변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문신 계열이 그를 중심으로 하여, 이의방 등의 일방적인 정국 주도에 반발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반란을 통해 거제에 부처 되었던 전 왕인 의종을 경주로 피신시켜 구지배 체제로의 복구를 시도했지만, 문신의 대대적인 살육과 의종 시해로 끝을 맺었다.
1173년(명종 3) 계사년(癸巳年)에 일어났으므로 ‘계사(癸巳)의 난’이라고도 한다. 김보당(金甫當)은 무신정변(武臣政變) 이후 정4품의 공부시랑(工部侍郎)과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 그는 1170년(의종 24) 무신 정변이 일어난 지 3년 후인 1173년 8월에 간의대부로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있으면서, 무신정변의 주동자 정중부(鄭仲夫) · 이의방(李義方) 등을 토벌하고 전(前) 왕인 의종(毅宗)을 다시 세우고자 병마녹사 이경직(李敬直) 및 장순석(張純錫) 등과 모의해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김보당의 난은 1173년(명종 3) 8월에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김보당 등 문신 계열이 동계(東界)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무신정변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문신 계열이 김보당를 중심으로 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이의방(李義方) 등의 일방적인 정국 주도에 대한 반발이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 반란을 통해 거제(巨濟)에 부처 되었던 전 왕인 의종(毅宗)을 경주(慶州)로 피신시켜 구(舊)지배 체제로의 복구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의방에 의한 문신의 대대적인 살육과 의종 시해로 끝을 맺었다.
이 반란은 1170년 이후 무신정권 하에서 문신 계열에 의해 일어난 대표적인 ‘반무신란(反武臣亂)’이었다. 그 목적은 무신정권(武臣政權)을 전복하고, 전 왕인 의종을 받들어 구지배 체제로 환원하려는 데 있었다. 반란 실패 원인은 의종의 복위가 여타 문신 계열 및 일반인들에게 큰 파급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반란에 가담한 인물들은 김보당의 동생 김지당(金至當)을 비롯하여 그와 개인적인 인맥으로 얽혀 있거나 의종 때 내시(內寺)를 지낸 자들이었다. 이들이 주로 문신 계열임을 고려할 때 이 반란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김보당이 죽을 때 “문신으로서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은 자가 없다.”라고 한 말이 계기가 되어, 무신정변 과정에서 화를 면하였던 문신들까지도 학살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