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죽림(竹林).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뒤에 신의주로 이주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 안동현(安東縣)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주인인 영국 사람 쇼(Show, G.)의 집을 근거로 여순근(呂淳根)·김두만(金斗萬)·오동진(吳東振)·홍성익(洪盛益) 등 10여 명과 안동현임시의사회(安東縣臨時議事會)를 조직하여 대표가 되었다.
1919년 국내외 80여 개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20년 5월 총재인 안병창 등이 체포되자 총재가 되어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이끌었다. 그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령으로 독립단 의주지국평북총감(義州支局平北總監)에 취임, 중앙기구를 만주 관전현(寬甸縣) 홍통구(紅通溝)로 이동시켰다.
남만주 각지에 분산된 여러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할 필요에 따라, 같은 해 12월 조병준(趙秉準)과 같이 평북독판부 대표로 청년단연합회 대표 안병찬(安秉瓚), 독립단 대표 김승학(金承學)과 같이 관전현 향로구(香爐溝)에서 각 단체의 통합을 권유하였다. 12월 12일 대한독립단의 백삼규(白三圭)·박장호(朴長浩)와 한족회(韓族會)의 김동삼(金東三) 등을 개별 방문하고 단체의 통합을 위해 교섭하였다.
이 결과, 관전현 홍통구에서 통일단체를 조직하였고 2월 임시정부와 연락, 승인을 얻었다. 남·북만주에 흩어져 있던 교민들의 통치기관으로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를 설치,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직속기구로 통할하였다. 남·북만주 군사기관은 광복군사령부라 칭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직할로 정하였다. 김승만은 참리부 협찬(協贊)에 취임하여 교민의 치안을 중점적으로 지도하였다.
그 뒤 대한청년단연합회 제2회총회에서 총무로 선출되었고, 평북독판부 재무사장(財務司長)·독판대리 등 간부로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1922년 겨울에는 통일군단(統一軍團)으로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자 서무부장에 취임하였고, 다음 해에는 교섭부장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31년 일본군의 동삼성 강점으로 활동에 어려움이 많자, 북경으로 가서 은둔생활을 하다 죽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