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안악 출신. 1906년 을사조약 체결 후 반일민족사상 고취를 위하여 김구(金九)·최명식(崔明植) 등 여러 동지와 함께 안악지구 신민회(新民會) 및 면학회(勉學會)를 설립하고 운영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1년 1월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암살미수라는 급조된 사건인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의 연루자로 김구·최명식 등과 같이 일본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구와 최명식에게 여비 300원을 주어 중국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하고 국내에 남아 있는 그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자신이 경영하는 동산평농장(東山坪農場)의 자금으로 후원하였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최명식이 국내의 연통제(聯通制) 조직의 임무를 띠고 들어오자 황해도 일대를 비밀리에 순방하면서 연통제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연통제가 폐지될 때까지 연통제 조직을 확대하면서 군자금 모금과 기밀문서의 전달 및 독립운동상황의 정보교환 등의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