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 아우구스티노(Augustino). 충청남도 공주 출생. 1883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에 유학하였으나 1891년부터 페낭 유학생을 불러들이게 되자, 그 이듬해에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편입해서 남은 학업을 마쳤다.
1899년 종현 성당(鐘峴聖堂 : 지금의 明洞聖堂)에서 주교 뮈텔(Mutel, G. C. M., 閔德孝)의 집전으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 해 5월 신부 페네(Peynet, 裵嘉祿)와 함께 제주도에 첫 선교사로 파견되어, 1900년에 서귀포 한논(지금의 서귀포시, 서홍동)에 본당을 창설, 제주도 전교의 기틀을 잡았다.
1901년 4월 피정차 서울에 올라와 있을 때, 제주민란으로 인해 다수의 교도가 희생된 교난이 발생했다. 이에 김원영 신부는 제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9월부터 경기도 양감에서 신자들을 돌보다가 1902년 5월에 황해도 봉산(鳳山)으로 전임되었다. 1906년 10월부터는 「경향신문」의 편집 실무를 담당했고, 1909년에는 경기도 행주천주교회의 초대본당신부로 부임하여 성당을 건립하였다.
1914년부터는 수원 갓등이 성당(지금의 旺林성당)의 주임신부를 겸임하면서, 교회에서 운영하던 삼덕학교(三德學校)를 4년제의 신명의숙(新明義塾)으로 개편하여 교육 사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1917년 갓등이 본당을 전담하게 되자, 1927년 성 바오로회의 수녀들을 초빙, 이 학교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1933년황해도 신계(新溪)로 전임되어 3년간 사목활동에 전력하다가, 1936년 봄 피정을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가 몸이 쇠약해져 임지에 돌아가지 못하고 주교관에서 요양 중 10월 7일에 죽었다. 유해는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