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위남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공조좌랑, 병조좌랑, 통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요산(樂山)
  • 자시(子始)
인물/전통 인물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563년(명종 18)
  • 사망 연도1618년(광해군 10)
  • 본관광산(光山)
  • 주요 관직통례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장동익 (경북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공조좌랑, 병조좌랑, 통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초명은 김종남(金終男). 자는 자시(子始), 호는 요산(樂山). 예조정랑 김석(金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적(典籍) 김세우(金世愚)이고, 아버지는 영동현감 김표(金彪)이며, 어머니는 감찰 김자위(金自渭)의 딸이다. 아들이 김헌(金憲)이고, 손자가 김우형(金宇亨)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김지남(金止男)과 함께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160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6년 감찰이 된 뒤 공조좌랑과 병조좌랑을 역임하였고, 1610년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17년에는 통례(通禮)가 되었다.

이때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폐모론이 대두되자 그에 반대하다가 하옥되어 추국(推鞫: 신문)을 받은 뒤 관직을 떠났으며, 이때부터 이름을 ‘김위남’이라 하였다. 그 뒤 구차스럽게 생을 영위할 수 없음을 주장하며 절식하다가 이듬해 죽었다.

문장은 독창적이었고, 시는 도연명(陶淵明)의 풍격이 있었으며, 필법은 안평대군의 것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그림 또한 뛰어났다.

참고문헌

  •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송자대전(宋子大全)』

  • - 『전고대방(典故大方)』

  • - 『대동야승(大東野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