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담양 출신. 1919년 향리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뒤 고향 동지 김성현(金聖炫)·문동길(文東吉) 등과 같이 신덕채(申德采)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조달의 밀령을 받고 유력자를 찾아 이 뜻을 펼 것을 결심하였다.
그 뒤,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 여섯 번에 걸쳐 곡성·담양 등지의 고향일대를 누비면서 임시정부의 군자금조달원임을 밝히고 군자금을 거두어들였다.
1921년 3명의 동지 가운데 김성현이 석곡면에 사는 김두길(金斗吉)의 밀고로 붙잡히면서 사실 전모가 드러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11월 1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1926년 12월 25일 특사로 2년이 감형되어 8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29년 여름에 출옥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