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기중(記仲), 호는 추담(秋潭)·훈재(訓齋)·영재(詠齋). 김한웅(金漢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유(金䄂)이고, 아버지는 부사(府使) 김윤국(金潤國)이며, 어머니는 우성정(禹成鼎)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12년 설서(說書)·검열을 지내고, 이듬해 봉교(奉敎)·정언(正言)을 거쳐, 1627년(인조 5) 정주목사로 있을 때 정묘호란을 당하였다. 능한산성(凌漢山城)의 수성장(守城將)과 정주절제사(定州節制使)로서 항전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1630년에 송환되어온 다음, 예안현감(禮安縣監)이 되었다.
그러나 적에게 항복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고, 김청중사건(金淸中事件)을 계기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위원(渭原)에 충군(充軍)되었다가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썼다. 저서로는 『신보휘어(新補彙語)』가 있는데, 모두 59권 60책으로 목활자본을 비롯하여 몇 종의 판본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