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경세생(耕世生). 평안남도 숙천 출생. 1902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사비로 도쿄 세이소쿠예비학교[正則豫備學校] 중학과에 입학, 1905년 9월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의 청강생으로 1905년부터 1908년까지 수학하였다.
유학시절에는 대한유학생회의 서기원·서무원, 태극학회(太極學會) 창립회원·평의원·총무원 등으로 재일본유학생단체를 위하여 헌신적 봉사를 하였다.
귀국 후에는 서부학회의 회원, 농림강습소 강사, 평양대성학교 교원 등을 역임하였다. 숙천군 취리면에 소학교를 설립하였고 갈산동농회(葛山洞農會)를 조직했으며, 신문잡지종람소(도서실)와 국문야간학교를 설치하였다. 또한, 농촌계몽운동으로 농회원 소유지에 식목을 권장하고, 식목하지 않은 소유지에는 농회에서 대식하도록 정했다.
이와 같은 농촌계몽운동은 오늘날의 농촌운동과 새마을운동의 선각자적인 구실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말기에 농업기술론과 농업정책론을 전개하여 농업 발전을 통한 국가진흥을 기하려고 했다.
농업기술에 관해서는 조림·양돈·양계·과수 등 각 분야에 걸쳐 논문을 발표하였고, 1909년『과수재배법(果樹栽培法)』(普文社)을 출간하였다.
농업정책론은 1907년 「아농가(我農家)의 전도(前途)」(太極學報 11)·「농업진흥책」(太極學報 16), 1908년 「농업의 보호와 개량에 관한 국가의 시설」(太極學報 17·18)·「농업의 개량」(西北學會月報 4)·「민업진흥의 사견」(西北學 會月報 5), 1910년 「아국농업론」(皇城新聞 1910.7.28.∼8.27. 漢城新聞 1910.9.6.∼9.14.) 등이 있다.
한말 농업계가 빈사상태에 있는 것을 한탄하고 농업진흥책의 강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진흥책으로, 대한농회의 설립, 농업교육제도의 개혁(고등·보통 교육), 농업시작장(모범농작지)의 설립, 시비·재배법에 대한 정부의 개입, 신용기관(농공은행·농업은행)·운수기관 등의 완비 등을 제창하였다.
끝으로, 한일합병 직전에 집필하기 시작하였던 『아국농업론(我國農業論)』은 전국 팔도에 대한 기후, 토지의 토성·생산력, 과수의 적정성, 경지·미경지의 구분 등 각 분야에 걸쳐 광범한 농업기술 및 시책론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한일합병으로 ‘제1장 평안도’에 관해서조차 완성하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