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최중천(崔仲天). 평안북도 의주 출신이다.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1939년 10월 충칭[重慶]에서 나월환(羅月煥)을 대장으로 하여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가입하였다.
그 해 겨울 공작대가 시안[西安]으로 이주하자 이해평(李海平)·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일선지구인 산시성[山西省]으로 파견되어 후쭝난[胡宗南] 직속의 중국 유격대와 합류하여 정보수집·적정탐색·초모공작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단신으로 일본군 여단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루안[潞安]에 잠입하여 문응국(文應國)·이병곤(李炳坤)·박춘섭(朴春燮)·정일명(鄭一明)·김형철(金亨澈) 등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여단사령부 통역으로 있던 이도순(李道淳)·고여순(高如順) 등 40여 명을 초모하여 함께 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이들을 시안으로 보내 장래 독립운동에 앞장 설 투사로 양성하였다.
한편, 중국 중앙 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 학원대한청반(第四團特科總大學員隊韓靑班)에 입학하여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로 개편되자 간부로 취임하였다.
그 뒤 이해평·김용주(金容珠) 등 수명과 더불어 허난성[河南省]의 뤄양[洛陽]·정저우[鄭州] 등지에 근거지를 정하고, 신샹[新鄕]·카이펑[開封]·타이위안[太原]·스자좡[石家莊] 등지를 거점으로 확보하면서 징모 제5분처로서의 지하 공작을 수행하였다.
1942년 광복군 개편으로 제5지대가 제2지대로 통합되면서 새로운 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의 지령을 받아 최철(崔鐵)·이원범(李元範)·최전(崔銓) 등 많은 청년을 새로 초모하여 시안에서 제2지대에 편입시켰다.
1943년 5월 산시지구에서 활동하며 이지성(李志成)·이운학(李雲鶴) 등을 적 점령 지역에서 탈출시켜 제2지대에 입대시켰다. 그 뒤 일본군의 군용 철도를 파괴하고 적군 부대를 습격하여 큰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1944년 3월 이서룡(李瑞龍) 등과 함께 산시성 타이위안으로 가서 전일묵(田一默) 등 20여 명을 규합하는 등 공작 성과를 올렸으며, 계속하여 스자좡·북경·타이위안 등지에서 국내침투 공작을 전개하던 중, 1945년 5월 일본 헌병에 잡혀 갖은 악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광복을 맞은 지 3일 만에 총살당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68년에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