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평원 출신. 김병두(金炳斗)의 맏아들이다.
1912년 국권회복의 뜻을 품고 만주로 갔으며, 1914년 봉천성(奉天省) 통화현(通化縣)의 군무교련소(軍務敎鍊所)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1916년까지 한족회(漢族會) 검찰원으로 있었으며, 1919년 신흥학교(新興學校) 속성과를 졸업하였다. 3·1운동 후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에 가담하여 집안현(輯安縣) 본부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7월 봉천성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출동하였던 동지 김련(金連) · 차병조(車秉曺) · 강진상(姜鎭祥) 등이 유하현 파출소의 일본경찰 다마이[玉井]에게 붙잡혀 압송되자, 이를 구출하기 위해 차용륙(車用陸)과 매복, 대기하였으나 실패하고 철수하던 중, 행인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경찰과 교전하다가 전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