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승문원부제조, 청송부사, 강릉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창원(昌遠)
성극당(省克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7년(명종 12)
사망 연도
1605년(선조 38)
본관
상주(尙州)
주요 관직
강릉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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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승문원부제조, 청송부사, 강릉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창원(昌遠), 호는 성극당(省克堂). 김예강(金禮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김윤검(金允儉)이고, 아버지는 옥과현감(玉果縣監) 김범(金範)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조식(曺植)과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9년(선조 12) 진사가 되고, 1585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발탁되고, 홍문관정자·저작(著作), 예문관검열 등을 거쳐 부수찬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형인 김홍민(金弘敏)과 함께 사림으로 영예를 누렸다.

1589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그 뒤 복관되어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될 무렵에는 경상좌도도사가 되고, 이어 교리 겸 시강원문학을 거쳐 이듬해 경연관·응교·사간·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있을 때,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李舜臣)을 탄핵하여 파면하게 하고 원균(元均)을 통제사로 삼게 하는 데 가담하였다. 그 뒤 좌부승지·훈련도감제조를 거쳐, 형조참의·대사간·이조참의·승문원부제조 등을 역임하다가 1598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이듬해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1604년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큰 비가 내려 백성이 많은 재난을 당하였다. 이에 약한 몸을 이끌고 수재로 죽은 자의 조문과 굶주린 자의 진휼에 힘써 직무에 충실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계곡집(谿谷集)』
『덕산사우연원록(德山師友淵源錄)』
『계곡집(谿谷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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