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변자 나경언은 액정별감(掖庭別監) 나상언(羅尙彦)의 형으로 형조판서 윤급(尹汲)의 청지기였다.
이 사건은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도 불구하고 세자를 옹호하는 시파(時派)와 그 반대파인 벽파(僻派)와의 암투에서 벽파가 크게 작용한 사건이다.
세자는 일찍부터 김상로·홍계희 등의 사람됨을 미워하였다. 그러자 두 사람은 장차 자신들에게 미치게 될 화를 두려워해 세자를 제거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영조의 후궁 문소의(文昭儀)와 세자의 동복(同腹)인 화완옹주(和緩翁主)까지 가세해 백방으로 세자를 무고하였다.
그리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입궁한 뒤, 그 아우 김구주(金龜柱)는 김상로·홍계희 등과 결탁, 세자와 영조를 이간시켜 결국 세자를 경운궁(慶運宮)에 이거하게 하였다.
1762년 5월 김한구(金漢耉)·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은 나경언을 사주, “세자가 일찍이 궁녀를 살해하고, 여승을 궁중에 들여 풍기를 문란시키고,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양에 미행했으며, 북성에 멋대로 나가 돌아다녔다.”는 등 10여조의 결점과 비행은 물론 장차 환시(宦侍)들과 모반할 것을 꾀한다고 형조에 고변하게 하였다.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된 영조는 격노해 비행을 알면서도 알리지 않은 신하들까지 문책하였다. 이에 세자는 너무도 억울해 나경언과의 대질을 요구했으나, 도리어 부왕의 꾸지람만 받았다.
한편, 영조는 고변자 나경언을 충직한 자로 보아 살려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남태제(南泰濟)와 홍낙순(洪樂純) 등이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으로 극론하자, 영조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처형하였다.
세자의 비행 문제는 이후 더 확대되어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이를 듣지 않자 세자를 폐해 서인으로 하고, 이어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굶어죽도록 하였다.
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이를 후회하고, 위호(位號)를 복구해 사도(思悼)라 시호하였다. 그리고 영조는 김상로 등에게 속임을 당한 것을 알고 그를 책망, 치사(致仕)하게 하고 세손(正祖)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라고 일러주기까지 하였다. 정조가 즉위해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했고, 다시 1899년에 장조(莊祖)로 추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