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국서(國瑞). 할아버지는 민징원(閔澄源)이고, 아버지는 판결사(判決事) 민정(閔貞)이며, 어머니는 장우인(張友仁)의 딸이다.
1480년(성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의 한림(翰林)으로 들어갔다. 1487년 부수찬으로 지방수령의 치적을 살피기 위하여 연기(燕岐)에 파견되었다.
그 뒤 1489년 지평, 1494년 장령을 거쳐, 1504년 사간·예조참의·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 대사헌을 거쳐 1511년(중종 6) 공조참판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513년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 1515년 평안감사로 제수되었으나 우찬성 신용개(申用漑)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듬해 다시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인사권 행사에 적격자가 아니라는 대관(臺官)들의 주장으로 체직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한성부좌윤으로 조광조(趙光祖)를 비호하였다. 1523년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세견선(歲遣船) 증액요구에 관한 의논에서는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후환을 예방할 것을 건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