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길보(吉甫). 박절문(朴切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참찬 박중손(朴仲孫)이고, 아버지는 예조참의 박미(朴楣)이며, 어머니는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의 딸이다.
1485년(성종 1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홍문관에 들어갔다. 가문은 증조부 이래 4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또는 홍문관에 들어갔고, 형제 네 사람이 모두 문과 출신으로서 일세에 문명을 날렸다.
1497년(연산군 3) 지평(持平), 1501년 부응교(副應敎), 1503년 장령(掌令) · 집의(執義), 1504년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 및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이 해에 이세좌(李世佐)가 왕이 내린 술을 엎질렀으나 박소영이 불경죄로 탄핵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笞)를 맞고 진천에 유배되었다.
1506년 갑자사화에 연루된 죄로 심한 고문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중종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났다. 1509년(중종 4) 형조참의, 1513년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이 때 이절(李茁)의 귀양지를 경기지역으로 옮긴 것과 유자광(柳子光)이 죽은 뒤 훈적(勳籍)을 회복하도록 한 조치를 부당하다고 논하였다.
1515년에 황해도관찰사, 1517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그러나 황해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승하(昇遐)했을 당초에 창기(娼妓)를 데리고 잤던 사실이 당상관의 체모에 부적절한 행동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았고, 마침내 1517년 8월 호조참의에서 체직되었다. 이듬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