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아버지는 이성현감(尼城縣監) 나사침(羅士忱)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종군했다.
특히, 안현전투(鞍峴戰鬪)에서 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외교적 수완이 능해 여러 차례 심양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1635년 창성부사(昌城府使)·의주부윤을 역임하고,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다시 심양에 갔는데 동지(同知) 이확(李廓)과 심양에 도착했다.
이 때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황제(皇帝)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했다.
우리 나라 사신에게도 경축반열에 참석하라고 했으나,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옷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지는 구타를 당했다. 구타와 회유를 거듭해도 시종 거부하다가, 청나라가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주어 돌려보내기로 하자, 내용을 알기 전에는 받을 수 없다고 받지 않았다.
100여 명의 기병으로 통원보(通院堡)까지 호송되었는데, 기병의 호위가 풀리자 통원보의 호인(胡人)에게 국서를 맡기고 귀국했다. 이 사실을 안 삼사(三司)와 조복양(趙復陽)을 중심으로 한 관학 유생들은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국서를 받았다고 논핵했다.
영의정 김류(金瑬)까지 가세한 조정의 거센 척화론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의 적절한 변호로 극형만은 면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과거 춘신사로 심양에 가서 하례를 거부,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유배에서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으며, 1639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