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 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주성의 서쪽에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15세기 어느 시점에 건립되었다고 판단된다. 나주향교 건립은 조선 건국 후 1읍 1교 원칙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의 향교 건립은 지방 인재 양성 및 교화를 위해 시행된 것이었다.
조선 전기 나주향교의 중건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성균관 대성전을 복원하는 데 나주향교 대성전을 모본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 대성전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만영(金萬英, 1624~1671)이 쓴 대성전 상량문에 따르면, 1670년에 대성전과 동무 · 서무를 중건했다. 1920년대에 서재와 충복사, 1952년에는 동무 · 서무 · 동재 등이 헐렸으나, 1959년에 동재 · 서재를 중건했다. 이후 1980년 명륜당과 동 · 서익당 보수, 1981년 담장 개축, 대성전과 동재 · 서재 보수 등이 행해졌다.
나주향교는 전묘후학(前學後廟) 형태로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배치되어 있고, 사마재, 수복청, 양사재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나주향교 대성전은 팔작지붕인데, 이는 맞배지붕인 경주향교 대성전과 다른 점이다. 그런데 성균관 대성전도 팔작지붕이고, 고려의 성균관이었던 개성향교 대성전 또한 팔작지붕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성균관 대성전 복원 당시 나주향교 대성전을 참고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향교 입구에는 1597년 향교의 수복(首僕)이었던 김애남을 기리는 충복사유허비(忠僕祠遺墟碑)와 박성건의 금성별곡시비가 있다.
조선은 건국 후 향교에 전답과 노비 등을 지급하고 교관을 파견해 교생들을 가르쳤고, 봄과 가을에는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도록 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유학 이념으로서 백성들을 교화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했고, 그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나주향교는 198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대성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밖에 『금성연계방안(錦城蓮桂榜案)』 · 『유림안(儒林案)』 · 『청금안(靑衿案)』 등의 향교 유생들 명단과 성균관, 타 향교 및 서원들과 주고받았던 문서인 『통문(通文)』 등이 남아 있어, 당시 향교의 역사상을 복원하는 데 주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