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판소리 (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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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에서 지정보호하고 있는 판소리 <흥보가>와 <심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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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광주광역시에서 지정보호하고 있는 판소리 <흥보가>와 <심청가>.
내용

광주광역시에서 지정보호하고 있는 판소리 <흥보가>와 <심청가>. 1974년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예능보유자 한애순(韓愛順)은 판소리에 애착을 가진 부친 한상학의 지시로 11세에 창평의 박동실(朴東實)한테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2세부터 17세까지는 박동실의 후원자인 박석기(朴錫基)의 정각에서 판소리 다섯마당 중 <흥보가>를 제외한 나머지를 학습하였고, 13세 때에는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음반을 취입하였다.

18세부터 21세까지는 화랑단체·조선성악연구회·조선창극단·여성국악동우회·동일창극단 등에서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왜정시대의 처녀 공출을 피하려고 결혼했으나 1년도 못 가서 이혼을 했다.

42세 무렵에 박녹주(朴綠珠)에게 3∼4개월 <흥보가> 한바탕을 사사했다. 그녀는 <흥보가>의 집터 다지는 대목과 <심청가>의 소상팔경을 특히 애창한다.

박동실은 기본적으로 박유전(朴裕全)-이날치(李捺致)-김채만(金采萬)으로 이어지는 서편제 소리 바디(명창이 독특하게 만들거나 다듬은 판소리의 한 대목)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분위기·장면·가사에 따라 <심청가>에서 예를 들면 범패중류나 심청이·심봉사의 직접화법이 아닌 가사 등엔 동편제를 섞어 불러 더욱 맛이 난다는 평을 받는다.

박녹주는 경북 선산 출생으로 박기홍(朴基洪)·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貞烈)·김정문(金正文)·김창환(金昌煥)·유성준(劉成俊)에게 사사했다. 12세 때 박기홍 문하에서 <춘향가>·<심청가>·<흥보가>를 학습했다.

박기홍의 타계 뒤엔 송만갑에게 배웠다. 또한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김정문에게 <흥보가>, 김창환에게는 <흥보가> 중 제비노정가를 배웠으며, 유성준한테서는 <수궁가>를 연마했다.

박녹주의 어린시절 그녀의 부친은 갓을 쓰고 부채를 손에 들고는 학습장 부근의 계단에 앉아 학습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 1928년에 콜럼비아레코드, 1929년에는 빅타, 1930년에는 오케와 태평양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맺고 음반을 취입하였으며, 1960년대에 지구레코드사에서 그의 <흥보가> 전바탕을 취입했다.

1933년에 조선성악연구회를 발족하였고 1935년엔 순천 출신의 독지가인 우석(友石)김종익(金鍾翊)의 특별 원조를 받아 서울 종로구 익선동의 한옥건물을 마련하여 성악연구회의 본부사무실로 사용함으로써 창극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해방 후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고 1952년에 국극사를 재건하여 창극발전에 애쓰다가 1960년 이후로는 후배양성에만 주력했다. <흥보가>(동편제)로 1965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으며 1979년 5월에 타계했다.

참고문헌

『판소리 이백년사』(박황, 사사연, 1987)
집필자
이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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