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공진(公鎭). 할아버지는 함양군수 남이성(南以聖)이고, 아버지는 감찰 남두화(南斗華)이며, 어머니는 울산부사 민여검(閔汝儉)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63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학문과 도덕이 조잡하고 공명하지 못하다고 평하고, 문묘에 종사하자는 청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물의를 일으킨 바 있어 1년간 과거응시를 정지당하였다.
1670년 대흥군수가 되어 부호들의 식리(殖利)를 막고 폭리의 해를 일소하였으며 고아와 과부 등을 구휼하였다. 이로 인하여 위혜(威惠)가 함께 드러났다.
1676년(숙종 2) 동몽교란을 거쳐, 1678년 종부시주부 · 사헌부감찰 · 형조좌랑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어 이듬해 청산현령(청산현령)을 역임하였고 1680년에는 너무 강직한 것이 원인이 되어 반대파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1681년(숙종 7) 감시(監試)의 시권(試券) 가운데 익명의 상변서(上變書)에서 김환(金煥) · 남중유 등이 비밀결사를 만들어 김포 근처 해도(海島)에서 반역을 꾀하는 모임을 가진다는 참소를 당하였으나, 상변서는 왕이 불태우고 문제화하지 않았다.
그 뒤 1689년에는 귀후서별제 · 공조좌랑 · 사직서령을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자신의 이해를 떠나서 권세가들을 억제하고 어려운 자를 구하였으며, 상사에도 굴종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위혜병(威惠幷)』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