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사직서령, 대흥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공진(公鎭)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26년(인조 4)
사망 연도
1701년(숙종 27)
본관
의령(宜寧)
주요 관직
사직서령|대흥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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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사직서령, 대흥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공진(公鎭). 할아버지는 함양군수 남이성(南以聖)이고, 아버지는 감찰 남두화(南斗華)이며, 어머니는 울산부사 민여검(閔汝儉)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63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학문과 도덕이 조잡하고 공명하지 못하다고 평하고, 문묘에 종사하자는 청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물의를 일으킨 바 있어 1년간 과거응시를 정지당하였다.

1670년 대흥군수가 되어 부호들의 식리(殖利)를 막고 폭리의 해를 일소하였으며 고아와 과부 등을 구휼하였다. 이로 인하여 위혜(威惠)가 함께 드러났다.

1676년(숙종 2) 동몽교란을 거쳐, 1678년 종부시주부 · 사헌부감찰 · 형조좌랑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어 이듬해 청산현령(청산현령)을 역임하였고 1680년에는 너무 강직한 것이 원인이 되어 반대파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1681년(숙종 7) 감시(監試)의 시권(試券) 가운데 익명의 상변서(上變書)에서 김환(金煥) · 남중유 등이 비밀결사를 만들어 김포 근처 해도(海島)에서 반역을 꾀하는 모임을 가진다는 참소를 당하였으나, 상변서는 왕이 불태우고 문제화하지 않았다.

그 뒤 1689년에는 귀후서별제 · 공조좌랑 · 사직서령을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자신의 이해를 떠나서 권세가들을 억제하고 어려운 자를 구하였으며, 상사에도 굴종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위혜병(威惠幷)』이 있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성호문집(星湖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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