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낙수(洛叟), 호는 죽리(竹裏). 할아버지는 남상훈(南尙熏)이고, 아버지는 의빈도사(儀賓都事) 남근명(南近明)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로 부사(府使) 이만봉(李萬封)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장원서봉사 남달명(南達明)에게 입양하였다.
1732년(영조 8)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주서·전적·병조좌랑·정언을 역임하고 북도병마평사감(北道兵馬評事監)이 되어 북관편의(北關便宜) 13조를 논하여 북관민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조좌랑으로 『속대전(續大典)』을 수찬하였으며, 보덕·집의를 거쳐 1747년 승지로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동부승지 등을 거쳐 1753년 의주부윤으로 백마산외성(白馬山外城)을 수축하고 둔전을 설치하여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였다.
1755년 대사간을 지낸 뒤 소론(少論) 잔당의 괘서사건이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하게 하였다. 이어 황해도감사, 도총관, 병조·형조의 참판, 한성부좌우윤 등을 거쳐 1762년 예조판서 겸 내의원제조가 되었으나 동생 남태회(南泰會)로 인하여 대간의 지탄을 받고 사직,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을 가르쳤다.
성품이 겸손하고 스스로 봉사하는 태도이었으며, 지론이 공평하여 존경과 질시를 함께 받았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죽리집』이 있고, 시호는 정희(靖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