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진(元鎭)·관보(觀甫), 호는 담정(澹亭)·학야(鶴野). 할아버지는 도승지 남치훈(南致熏)이고, 아버지는 공조좌랑 남필명(南弼明), 어머니는 한성판윤 신후재(申厚載)의 딸이다.
1723년(경종 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7년(영조 3)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8년『숙종실록(肅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그 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죄인 국문 등에 신속히 대처한 공으로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 뒤 전적·예조좌랑·지평·병조좌랑 등을 거쳐, 1734년 정언에 이르러 당시 영상인 심수현(沈壽賢)을 탄핵하다가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좌천되었다. 뒤에 조현명(趙顯命)의 주청으로 1735년 장악원첨정을 시작으로 필선·장령·정언·지제교·헌납·집의·수찬·교리 등의 대각(臺閣)을 두루 역임했다.
당시 기강퇴폐(紀綱頹廢), 재용 낭비, 풍속 괴패,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논쟁 등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유배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으며, 1743년 병조참의·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형조참의·강화유수·형조참판·호조참판·한성부윤·대사헌·대사성·개성유수를 역임했다.
그 뒤 1760년에 자헌(資憲)으로 승계해 지돈녕부사·한성판윤·내의원제조를 거쳐 정헌(正憲)으로 승계, 형조판서·예조판서·세자우빈객·도총관·경기감사·홍문관제학을 거친 뒤, 1767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나이 70이 되자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숭록(崇祿)으로 승계한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 성품이 단정하고 스스로 행동을 잘 지켜 관직 생활 50년 동안 파당적인 논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문장이 우아하고 시문에 화실(華實)이 구비되었으며, 제자백가에도 통달했다. 저서로는 『담정유고』가 있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