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지(朗智)는 문무왕 때에 삽량주(歃良州) 아곡현(阿曲縣) 영취산(靈鷲山)에 머물렀다. 그는 암자에 오랫동안 머물렀지만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기에 고을에서는 그를 알지 못했다. 낭지는 평소에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였으며 법력을 통해 자유자재로 신통력을 보였다. 그는 661년(문무왕 원년)에 뒷날 의상의 제자로서 『추동기(錐洞記)』를 지은 지통(智通)이 보현보살(普賢菩薩)에서 정계(正戒)를 받고 찾아오자 출가를 시켰다. 낭지가 머물던 암자를 사람들은 혁목암(赫木庵)이라 했다. 그는 “이 암자 자리는 가섭불(迦葉佛) 때의 절터인데 땅을 파다가 등항(燈缸) 두 개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낭지는 영취산 혁목암에서 최소한 135세 이상을 살았다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음과 같은 신이(神異)한 이야기가 전한다. 낭지는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강설을 듣고 잠깐 사이에 돌아오곤 하였다. 어느 날 그 절의 승려가 여러 대중에게 명을 내렸다. “이 절에 상주하는 자를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승려들은 각기 자기가 사는 곳의 이름난 꽃과 진기한 나무를 가지고 와서 도량에 바치라.” 이튿날 낭지는 산속에서 이상한 나무 한 가지를 꺾어서 절의 승려에게 바쳤다. 그러자 그 승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나무는 범어로 달제가(怛提伽) 즉 혁(赫)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서천축(西天竺)과 해동의 영취산에만 자란다. 이 두 산은 모두 제십 법운지(法雲地)로서 보살이 사는 곳이니 이 사람은 반드시 성자일 것이다.” 청량산의 법사가 낭지의 행색을 살펴보고는 그가 해동의 영취산에 사는 것을 알았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혁목이 자라는 산에 머무는 보살을 법운지(法雲地)보살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당시에 낭지가 십지보살(十地菩薩)로 존경을 받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원효(元曉)는 울산의 반고사(磻高寺)에 머물면서 낭지의 조언을 듣고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지었다고 한다. 책이 완성되자 은사(隱士) 문선(文善) 편에 보내 감수를 청하면서 책 말미에 다음과 같은 게를 지어 붙였다. “서쪽 골의 사미가 머리를 조아리며, 동쪽 봉오리 상덕에게 예를 올리네, 가는 티끌 불어 영취산에 보태고, 잔 물방울 날려 용연에 던지네.” 원효는 낭지를 ‘동악 상덕’이라 높이고, 자신은 서곡의 사미로 낮추고 있다. 또 그는 낭지의 학덕을 ‘영취산’과 ‘용의 못’이라 칭송하는 반면에, 자신의 성취는 ‘가는 티끌’과 ‘잔 물방울‘이라 칭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당시 불교계에서 낭지의 위상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낭지는 원효와 지통의 스승이었으며 당대의 대표적 고승이었다. 신라 하대인 원성왕 때 고승 연회(緣會)가 영취산에 살면서 낭지의 전기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고 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