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공필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조선 전기에, 우찬성,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이칭교성군(交城君)
  • 국일재(菊逸齋)
  • 희량(希亮)
인물/전통 인물
  • 본관교하(交河)
  • 사망 연도1516년(중종 11)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우찬성|영중추부사
  • 출생 연도1445년(세종 27)
  • 출생지교하(交河: 지금의 파주)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홍순창 (대구대학교, 동양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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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우찬성,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희량(希亮), 호는 국일재(菊逸齋). 할아버지는 동지돈영부사 노물재(盧物載)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이며, 어머니는 첨지(僉知) 경유근(慶由謹)의 딸이다. 경기도 교하현(交河縣: 지금의 파주)출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62년(세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사직서영(社稷署令)을 지낸 뒤 1466년 춘시 문과에 2등으로 급제, 성균관직강이 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부제학을 거쳐 병조·이조·예조의 참의와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483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1489년에 공조판서가 된 데 이어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1500년 교성군(交城君)에 봉해 졌다. 1503년 우찬성에 올랐으나, 이듬해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좌되어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귀양에서 풀려나와 다시 우찬성이 되었다가 1507년(중종 2)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명나라에 가서 중종 즉위의 경위를 설명하고 명나라 왕으로부터 권서국사(權署國事)의 칙지를 받아 귀국하였다. 그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올랐다.

1514년 영중추부사로 벼슬을 그만둔 뒤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충성심과 효심이 지극하고 일가친척의 관혼상제를 두루 살폈으나, 자신은 검소한 생활에 만족하였다.

참고문헌

  •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이락정집(二樂亭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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