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회회인(回回人)의 아내와 간통한 죄로 장형을 받고 돌아왔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서주(瑞州)의 수령으로 임명되자, 대신 부임하러 갔다가 사실이 탄로나 장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충혜왕의 비호로 다시 내승별감(內乘別監)이 되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曺頔)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시종한 공으로 복위 후 1등공신에 책록되고 직성군(直城君)에 봉해졌다.
충목왕 초에는 인척인 풍저창부사(豐儲倉副使) 이인수(李仁壽) 등의 부정을 왕명을 빌어 무사하게 해주었다. 1344년 덕녕공주(德寧公主)에 의해 광양(光陽)으로 귀양가고, 1351년에는 이제현(李齊賢)에 의해 가덕도(可德島, 嘉德島, 또는 加德島,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로 이배(移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