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6년(고정 3) 삭주(朔州)의 분도장군(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거란의 유족들이 대거 침략해 들어왔는데도 절에서 불공만을 드리면서 방어전을 포기한 채 개경으로 도망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그 뒤 변산(邊山)으로 내려가 여러 해 동안 승려생활을 하였다. 그뒤 최우(崔瑀)가 집권하면서 다시 발탁되어 그의 측근이 되었으며, 곧 상장군까지 올랐다.
1222년에는 광주(光州) 등 전라도지역에 소재한 자신의 토지를 송광사(松廣寺)에 시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이를 모살하려는 희종복위운동(熙宗復位運動)에 연루되어, 1227년 주연지(周演之) 등과 함께 처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