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판(露板)이라고도 한다. 두 가지 해석이 있다. 그 하나는 문서에 봉투를 봉하지 않는 것으로 공개적으로 선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채옹(蔡邕: 중국 후한(後漢)의 학자 )의 『독단(獨斷)』에서 말한 “오직 사령(赦令: 국가적인 경사가 있을 때 죄인을 용서하여 놓아주던 일을 널리 알림)과 속령(贖令)은 삼공(三公)을 직접 불러 조당(朝堂: 조정)에서 명령서를 내리고 사도(司徒: 삼공의 하나)가 봉인한 뒤에 노포로 군현(郡縣)에 내린다.”라 한 것이다.
현존하는 작품이 없어 문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또 하나는『문체명변(文體明辨)』에서 “승전(勝戰)의 보도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포백(布帛: 베와 비단)에 글을 써서 장대 위에 걸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널리 알리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 해석이 아주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문장연기(文章緣起)』에 “한(漢)나라 가홍(賈洪)이 마초(馬超)가 조조(曹操)를 칠 적에 노포를 지었다.”라 하였다. 『세설(世說)』에도 “환온(桓溫)이 북벌(北伐)할 적에 원굉(袁宏)으로 하여금 말에 기대어 노포를 쓰게 하였다.”라는 것으로 보면, 노포는 승전보(勝戰報)뿐이 아닌 선전포고(宣戰布告)였음을 알 수 있다.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에 “노포는 승전보의 별명이다. 한대부터 있었다.”라는 것으로 보면, 노포는 선전포고와 승전보에 공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후대에 오면서 승전보로만 쓰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노포가 보인 것은 『동문선(東文選)』의 총병관 중서평장사 정세운(鄭世雲)이 홍건적을 평정한 노포이다. 저자는 미상으로 역시 승전보이다. 노포는 문장이 변려문(騈儷文)으로 되어 자구(字句)가 정제되었고 용사(用事)를 많이 썼다. 문장도 매우 아름답게 짜여 있다. 이러한 문체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에 큰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