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상대방을 힐난하는 문제를 먼저 가정하여 전제해놓고 그를 반박하는 자기의 의사를 토로하는 것이 주된 형식이 된다. 그러므로 같은 대이지만 국가시험인 대책(對策)과는 마땅히 구분이 되어야 한다.
대는 중국 고대 송옥(宋玉)의 <대초왕문 對楚王問>을 시초로 삼는다. 그 이유는 <대초왕문>의 문체가 그 뒤에 명작인 동방삭(東方朔)의 <답객난 答客難>, 양웅(揚雄)의 <해조 解嘲>, 반고(班固)의 <답빈희 答賓戱> 등의 전형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당대(唐代) 한유(韓愈)의 <대우문 對禹問>도 바로 그 지류이며, 소식(蘇軾)의 <일유 日喩>도 역시 거기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겠다.
우리 나라에도 대는 중국과 같은 양상이다. 이상한 관상장이의 역설적인 관상이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이규보(李奎報) 의 <이상자대 異相者對>와 , 중국 은나라 때에 두 어진 신하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의 우열을 논한 이첨(李詹)의 <객대 客對>가 ≪동문선≫에 처음으로 실려 있다.
이들 내용을 요약하면 모두 객이 힐난하는 문제를 자신의 처지로 우회하여 정당화한 것이다. 결국 선비들이 자기의 불우에 대한 울분을 풀고 위안을 가지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문체에 문대(問對)라는 것이 있으니 문(問) 또한 문인의 가설적인 말이다. 이름은 대(對)와 비록 다르나 그 실상은 다름이 없다. 그리하여 이름과 실상이 모두 문(問)인 것은 굴평(屈平)의 <천문 天問>, 강엄(江淹)의 <수고편 邃古篇> 등이다. 그것이고, 이름은 문(問)이고 실상은 대(對)인 것은 유종원(柳宗元)의 <진문 晉問>이다.
기타의 난(難) 또는 유(諭)라는 것이나 답(答) 또는 응(應)이라는 것도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문대(問對)의 유이다.
대는 ≪좌전 左傳≫·≪사기 史記≫·≪한서 漢書≫ 등에 옛날 군신(君臣) 간에 서로 문답하는 것이다. 후인들이 그것을 모방하여 가설적인 말을 해서 자기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