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강(安康). 자는 인백(寅伯), 호는 일소(一笑). 할아버지는 노전(盧銓)이고, 아버지는 노팔원(盧八元)이며, 어머니는 송희록(宋希祿)의 딸이다.
1637년(인조 15) 참봉으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44년 성천부사(成川府使)로서 행대사성이던 김육(金堉)이 왕자·대신(大臣) 이외의 사신들은 유옥안거(有屋安車)를 타고 다니도록 상소하자 이에 찬성하였다.
1649년 동래부사가 되어 변방사정은 중앙과 달라서 수시로 변통에 대처하지 않으면 외교관계가 두절되기 쉬우므로, 모든 외교문서는 중앙의 회답을 받지 않고도 먼저 대처한 뒤에 다시 허락을 받을 수 있도록 건의하였다.
그런데 효종이 즉위한 뒤 안찰사 이만(李曼)과 함께 올린 장계에 따라 조정에서는 일본에 대처하기 위해 연병(鍊兵)을 할 의견이 있어, 청나라에 알리지 않고 성지(城池)를 수련(修鍊)하고자 하였다. 이것을 안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영상이던 이경석(李景奭)의 문죄를 요청함에 따라 당시 실무자였던 관계로 창성부(昌城府)에 유배되었다.
그 뒤 1652년(효종 3)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이전의 일로 대간의 소척을 받아 체직되고, 1654년 비변사회의에서 다시 거론되어 삭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