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 면적은 5,590㎥이다. 1634년(인조 1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 이전 연산면에는 김장생의 아버지인 계휘(繼輝)가 설립한 경회당(慶會堂)이 있어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고, 김장생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1634년 양성당과 경회당을 중심으로 서원이 건립하게 되었고, 1660년(현종 1)에 ‘돈암(遯巖)’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하였다.
1658년(효종 9)에 김집(金集)과 1688년(숙종 14)에 송준길(宋浚吉), 1695년에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가 배향하였다.
본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양성당·응도당(凝道堂)·장판각(藏板閣)·정회당(靜會堂)·산앙루(山仰樓)·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과 하마비(下馬碑)·송덕비(頌德碑)가 있다.
김장생을 중심으로 김집·송준길·송시열이 배향되어 있는 사우는 전면 1칸통(間通)을 개방하여 집채의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칸살인 전퇴(前退)를 두었고, 실내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인 주간(柱間)의 앞면에만 사분합(四分閤) 띠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면은 회벽을 쳤다. 공포(栱包)는 이익공(二翼工) 외출목(外出目) 집과 동일한 수법으로 짜올렸으나 전각의 기둥 위에 덧붙인, 소의 혀와 같이 생긴 장식인 쇠서[牛舌]는 그 형태가 가늘고 빈약하다.
그러나 내부의 양봉(樑奉)은 전통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장여나 소로, 화반을 받는 가로재인 창방(昌枋) 위에 배치된 화반형(花盤形)의 초각(草刻)은 기둥 사이마다 1개씩 얹었다. 지붕 가구(架構)는 퇴고주(退高柱)를 세워 퇴량(退樑)과 대들보를 걸었는데, 새우처럼 휘어진 목재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 일종의 포대공(包臺工)을 얹고, 퇴고주와 마룻보인 종량(宗樑)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두어 종도리(宗道里)를 받쳤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소장 전적으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상례비요』 등 78종 245책이 있으며, 유물로는 『상례비요(喪禮備要)』 판각 2100판과 옥등잔(玉燈盞)·사액연(賜額硯) 등이 있다. 재산은 전답 3600여평, 임야 6.5정보가 있다.
논산의 돈암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