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은 외국사신이 머무르는 숙소로 서울의 태평관(太平館)·동평관(東平館)·북평관(北平館)과 각 고을에 객사(客舍)를 두었는데, 그 중 평양의 것을 대동관이라 하였다.
평양은 경의가도(京義街道)의 요충으로 조선 초부터 중국 또는 우리 나라 사신이 빈번히 내왕하며 그 곳에서 유숙하기 때문에 여느 공관과는 달리 그 규모도 웅장하였다.
1588년(선조 21)윤두수(尹斗壽)의 『평양지(平壤志)』에 의하면 청옥(廳屋) 3칸, 전헌(前軒) 3칸, 후당(後堂) 3칸, 좌우협문 각각 1칸, 좌우의 낭방(廊房)은 각각 7칸이고 중문은 1칸이며, 문 좌우에는 협문이 있고, 좌우의 익랑(翼廊)은 4칸인데 그 모퉁이에 각각 1칸의 문이 있으며, 대문은 3칸으로 그 위에 누(樓)가 셋, 시렁은 3칸, 4면은 난간이고 각각 4칸의 좌우 익랑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처음 건축한 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최초로 보이며, 1440년(세종 22) 실화로 타버린 것을 그 뒤에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 그 곳에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자주 접견하였다.
1727년(영조 3)윤유(尹游)의 『평양속지』에는 1654년(효종 5) 감사 허적(許積)이 중수하고, 1711년(숙종 37) 문루를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804년(순조 4) 화재로 소진된 것을 감사 이서구(李書九)가 중건하였고, 1811년 또 다시 화재를 당하였다가, 이듬해 감사 정만석(鄭晩錫)이 다시 재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