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5년(고려 고종 32) 제작. 지름 77.3cm. 이 작품이 소장된 다구쓰다마신사는 쓰시마의 최남단에 위치한 이즈하라[嚴源町]의 한적한 해안 근처의 낮은 산 중턱쯤 자리잡고 있다.
반자는 고면(鼓面)을 2줄의 융기동심원으로 시문하여 당좌구(撞座區)·중구(中區)·외구(外區)의 3구획으로 구분하였다. 당좌구 안에는 1+8개의 연밥을 돌출 시문하고 그 전체를 8릉형으로 감싼 뒤 다시 외곽을 3줄의 국화형 테두리로 구획한 자방(子房)으로 만들었다.
자방 주위에는 연판마다 화형장식이 첨가된 8엽 연화문을 간엽(間葉)과 함께 고부조하였다. 이러한 당좌의 자방은 고령사반자(高嶺寺飯子, 1213년)나 복천사반자(福泉寺飯子, 1238년)와 비슷한 형태이지만 연판 부분에 꽃술 형태의 문양이 번잡하게 장식되어 보다 화려해진 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은 형태의 당좌와 연판의 표현은 1233년에 제작된 해남 대흥사(大興寺) 소장 탑신사명(塔山寺銘) 종과 같은 13세기에 조성된 범종 당좌에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어 당시에 널리 유행되었던 당좌 형식이라 짐작된다.
중구에는 이 시기의 금고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문양이 없는 대신 외구를 가득 채운 유려한 연당초문(蓮唐草文)이 고부조되었다. 이 연당초문처럼 연잎이 활짝 벌어지고 줄기와 잎이 율동적이면서도 회화적으로 표현된 문양은 고려 후기의 불상 및 불화의 가사(袈裟) 옷깃장식 등에 즐겨 사용된 문양으로서, 반자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문양은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몇 개의 문양판을 잇대어 찍어낸 것으로서 문양판의 내·외곽에 해당되는 원형 구획과 접합 흔적이 외구면에서 도드라지게 부조되어 확연히 구별할 수 있다. 후면에는 너비가 좁은 구연부(口緣部)가 안으로 굽어 있으며 이곳을 돌아가며 쌍구체(雙鉤體)의 유려한 구름문이 6개소에 배치되어 있다.
측면에는 상부 중앙에 1개, 그리고 90도 간격으로 1개씩 도합 3개의 고리[耳]를 부착하였고, 이 곳에 오목새김명문을 새겼다. 그 내용은 ‘禪源乙巳五月日晉陽府□福寺飯子一座(?)(선원을사5월일진양부□복사반자일좌(?))’로서 첫머리의 ‘禪源(선원)’은 ‘진원(津源)’ 또는 ‘이원(理源)’으로도 읽혀져 왔으나 ‘선원’으로 보이며 당시에 쓰였던 독자적인 연호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그리고 제작년의 간지인 ‘을사(乙巳)’는 이 금고의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1185년, 1245년, 1305년 가운데 1245년(고종 32)의 을사년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또, 제작지인 ‘진양부(晉陽府)’는 일부의 학자들이 지금의 ‘진주(晋州)’의 옛 명칭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진주가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로 개칭된 것은 조선 1392년(태조 1)의 일이며 그 이전까지는 청주(菁州)·강주(康州)로 불려진 사실로 미루어 이 금고의 제작시기의 명칭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진양부(晉陽府)’는 지명이라기보다 『고려사』 129 열전(列傳) 42에 보이는 ‘高宗二十一年封晉陽侯(고종 21년 봉진양후)’의 내용처럼 진양공(晉陽公) 최우(崔瑀)의 부에서 제작하여 어느 절에 시납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령사반자가 강종(康宗)의 딸인 수령궁주방(壽寧宮主房)에서 무신에 의해 발원된 점이라든지, 복천사반자에 보이는 최우의 수복연장(壽福延長)을 기원하는 명문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최씨 무신집권하에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예라 할 수 있다. 절 이름 가운데 첫 자는 불명하다.
한편 반자의 고면(鼓面) 가운데의 여백면을 활용하여 또 다른 오목새김명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 작품이 일본에 건너온 다음에 기록된 추각명(追刻銘)임을 알 수 있다. 그 내용 가운데 ‘正平十二丁酉(정평12정유)’는 일본의 연호로서 1357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반자가 조성된 1245년 이후부터 1357년 사이의 어느 시기쯤 우리 나라에서 쓰시마 섬로 건너가(혹은 탈취되어) 지금의 장소에 소장되었음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