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인 극락전에 봉안된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인 철불좌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인 동종은 하단에 음각되어 있는 명문(明文)에서 1635년(인조 13)에 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복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중창되면서 절의 세력을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절이 폐사되고, 작은 암자로 유지되다가 조선 후기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철종 때 절의 이름을 대복사라고 바꾼 것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남원의 벼슬아치 대복(大福)이 새로 부임하는 군수를 맞이하기 위해 집을 나간 사이에 한 비구니가 와서 그의 처에게 가사 한 벌을 시주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그의 처는 대복과 집안의 복락을 위하여 옷감 한 필을 시주하였다. 대복이 신임 군수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읍의 다리에 이르자, 다리 아래에서 ‘대복’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복이 내려가 보니 귀와 뿔을 지닌 큰 구렁이가 머리만 드러낸 채 사람의 말을 하였다. 뱀은 "대복이 이달 안으로 반드시 죽어서 뱀의 몸을 받을 것이나, 집에서 가사불사에 시주한 공덕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재물을 탐하고 절을 짓지 않으면 이후 뱀의 과보(果報)를 30년 동안 받으리라”라고 하였다. 절을 지어 주면 뱀이 대복의 과보를 천 년 동안 대신해서 받을 것이니, 절을 지어서 이 추한 과보에서 벗어나기를 부탁하였다. 대복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뱀과 약속을 하였으나,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한 사실을 추궁하였다. 그는 가장이 출타 중에 아내가 마음대로 시주한 것을 분하게 여겨 아내를 죽이려고 활을 쏘았다. 그러나 도리어 자신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때 절에서 가사를 만들고 있었는데 불덩어리가 날아와 가사에 구멍을 두 개 내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비구니가 대복의 집에 와서 전후 사실을 듣고 대복을 감화시켰고, 큰 구렁이를 위하여 절을 짓고 대복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후 다시 폐사로 버려져 있던 것을 1938년에 박경찬(朴敬贊)과 청신녀 황씨(黃氏)가 중건하였다. 1960~1970년대 초에 승려 월호와 보살 견성화가 대복사 불교회관을 건립하였으나 이는 현존하지 않는다. 1997년 요사(寮舍) 건물을 지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극락전과 칠성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극락전 앞에는 창건 당시에 만들었다는 석불이 남아 있다. 극락전 내부에는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인 아미타불 철불좌상이 주불로 봉안되어 있으며 신중탱화, 아미타후불탱화, 지장탱화가 있다. 또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인 동종이 있다. 대복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