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을 묘사한 불화. 사찰의 명부전(冥府殿)에 많이 봉안된다. 이 탱화의 기본형은 지장보살과 좌우보처(左右補處)인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중심으로 명부시왕(冥府十王) · 사자(使者) · 장군(將軍) · 졸사(卒使), 사방을 지키는 호법신 사천왕(四天王)을 안배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 지장탱화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① 지장독존도(地藏獨尊圖), ② 지장삼존도(地藏三尊圖), ③ 지장삼존신중도(地藏三尊神衆圖), ④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등이다. 첫째, 지장독존도는 고려나 조선 초기에 많았으며, 대부분이 입상(立像)이다. 흔히 두건을 쓰고 석장(錫杖 : 중이 짚는 지팡이)을 짚거나 여의주를 들고 있다.
둘째, 지장삼존도는 ≪지장보살본원경≫을 근거로 하여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서 거느리고 있는 탱화이다. 셋째, 지장삼존신중도는 삼존 이외에 관세음보살 · 용수보살(龍樹菩薩) · 다라니(陀羅尼) · 금강장(金剛藏) ·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 중 2명 내지 4명의 보살을 함께 배치한다.
그리고 제10 전륜대왕(轉輪大王)과 사천왕 · 대범(大梵) · 제석(帝釋)을 호법신중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탱화는 여러 가지로 변화되므로 그 형식이 일정하지 않다. 넷째,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 십대왕과 판관 등이 함께 묘사된 탱화이다. 이 탱화에서는 지장 신앙과 더불어 명부시왕 신앙이 혼합된 것임을 살필 수 있다.
지장시왕도는 고려 때의 작품과 조선시대의 작품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지장보살의 권속들을 본존인 지장보살상의 대좌(臺座) 아래쪽 좌우에 배치하였다.
이에 반하여 조선시대의 지장시왕도는 여러 존상의 배열이 위쪽으로 올라온다는 특이점을 지닌다. 이와 같은 구도는 고려 불화와 조선 불화를 비교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또한 고려시대의 지장시왕도에서 명부시왕 및 그 권속은 아직 독자적인 신앙이 크게 강조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조선시대의 지장시왕도에서는 비록 지장탱화에 종속적으로 참여한 명부시왕이기는 하지만, 그 신앙적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독자적인 시왕도를 별도로 도설하는 형식이 많이 생겨났다.
이는 지장 신앙의 순수성이 감소되고 이질적인 신앙 요소가 강조된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왕 신앙의 기능이 강화됨으로써 지장 신앙의 기능이 더욱 강화된다는 역설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밖에도 조선시대의 지장시왕도에서는 지장보살이 육도(六道 : 天 · 人 · 阿修羅 · 畜生 · 餓鬼 · 地獄)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육도에 각각 나타나는 육지장(六地藏), 즉 육광보살(六光菩薩)로 많이 묘사되어 있는 것도 고려 불화와는 다른 특색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장탱화에서 몇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지장보살이 두건(頭巾)을 쓴 형태와 머리를 깎은 승형(僧形)의 두 형태 중 조선 전기 이전에는 승형이 약간 많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승형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앉아 있는 형식은 결가부좌 형태와 한 발을 내려뜨린 반가(半跏)의 형태 등 두 가지가 있는데, 결가부좌를 훨씬 많이 취하고 있다.
셋째, 인계(印契)의 모양이다. 왼손에 석장을 짚고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잡은 형식, 왼손에 석장이나 구슬을 잡고 오른손은 둘째와 셋째 손가락 끝을 가슴에 대어 올린 형태, 두 손 모두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대어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들었으며 석장은 도명존자가 대신 가지고 있는 형태 등 다양하다.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지장탱화 중 대표적인 고려시대 작품으로는 일본 닛코사(日光寺) 소장의 지장시왕도와 독일 베를린동양미술관 소장의 지장시왕도, 일본 세이카당(靜嘉堂) 소장의 지장시왕도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작품으로는 일본 고메이사(光明寺)에 있는 1562년 작품과 일본 사이호사(西方寺)에 있는 1500년경의 작품,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1725년(영조 1년)의 팔공산 북지장사(北地藏寺) 지장탱화, 1747년에 조성된 영천 은해사 운부암의 탱화, 1744년에 조성된 고성 옥천사(玉泉寺)의 지장시왕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