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예숙(禮叔). 호는 관헌(管軒).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역학(易學)·산학(算學)·병학(兵學)·의학·패관(稗官) 등에 능하였고, 사부(詞賦)와 문장에 뛰어났다. 그러나 30세 이후부터는 오로지 성리학 연구에만 힘썼으며, 그 언행이나 저서가 오직 성리학에 근본하는 것이 되도록 하였다. 고을에 있는 사단(社壇)이 황폐하다 하여 1만 전(錢)을 내어 고치기도 했다.
그 밖에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여 사풍(士風)을 진작시키고, 후진을 양성하고 유학의 부흥에 힘썼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직첩(조정에서 내리는 관리 임명장)이 내려졌으나 받지 않았다.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으로 당시 장석영(張錫英) 등과 편지를 통하여 태극 및 심설(心說)에 대한 논변이 있었다. 저서로는 『관헌집(管軒集)』이 있고, 그 밖에 『소학문난(小學問難)』·『대학강설(大學講說)』·『춘추의례(春秋義例)』·『사례절략(四禮節略)』·『관복집설(冠服輯說)』·『심근강의(心近講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