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는 성교24개석(城郊二十四個石)으로도 불렸다.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돈화시문물관리소(敦化市文物管理所)에서 2005년 7월 25일부터 8월 10일까지 발굴조사하였다. 돈화시내에 위치한 오동성(敖東城)에서 목단강(牧丹江)을 사이에 두고 동남쪽 약 1㎞ 떨어져 있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목단강은 이 유적에서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져 있으며 동북쪽을 향해 흘러간다. 이 유적 서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는 장춘(長春)-도문(圖們) 간 철도가 지나며, 남쪽에는 연길(延吉), 영안(寧安)으로 통하는 도로가 지난다. 또한 서남쪽 6㎞ 떨어진 곳에는 발해시대의 대표적인 고분군인 육정산고분군(六頂山古墳群)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길림성중점문물보호단위(吉林省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어 있다.
유적은 남북방향이며 24개의 현무암을 각 열마다 8개씩 모두 3열로 나누어 배열하였다. 현재 가운데 열의 동쪽에서 4번째 것이 사라져 23개가 남아 있다. 정면 길이는 북쪽 열 10.2m, 가운데 열 9.9m, 남쪽 열 10.3m이다. 측면 길이는 동단(東端) 7.85m, 남단(南端) 7.7m이며, 남쪽 열과 가운데 열 주춧돌 중심 사이의 간격은 3.6m, 가운데 열과 북쪽 열 주춧돌 사이 간격은 3.4m이다. 주춧돌은 가공을 하여 윗면은 모두 평평하게 다듬었는데, 전체적인 형태는 둥근기둥모양에 가까우며, 지름은 90㎝∼1m, 높이는 81∼92㎝이다. 같은 열에 서로 인접해 있는 주춧돌 사이의 거리는 약 1.2∼1.5m이다. 각 열의 양쪽 끝에 위치한 주춧돌에는 길이 60∼73㎝, 너비 40∼50㎝, 깊이 4∼8㎝의 홈이 나 있어 인방목을 걸칠 수 있도록 하였다.
3열의 주춧돌 아래에는 주춧돌 너비만큼의 골을 동서 방향으로 파고 그 안에 황색 점토와 현무암 잡석을 섞어 채워넣어 하나로 연결된 줄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줄기초의 동서 길이는 약 11.2m, 너비는 약 1.86m, 깊이는 약 66㎝이다. 한편 유적 서쪽으로 2.6m 떨어진 지점에서는 일부가 결실된 아궁이 터 1곳이 확인되었다. 아궁이 터의 동서 너비는 74㎝, 남아 있는 남북 길이는 72㎝, 남은 깊이는 20㎝이다. 아궁이 터 북쪽으로는 곡자 형태의 연도(烟道)가 연결되는데, 남북 방향의 연도 길이는 1.9m, 너비 15∼20㎝, 깊이 5∼16㎝이며, 동서 방향의 남은 길이는 86㎝, 너비 20㎝, 깊이 5㎝이다.
출토된 유물은 암키와로 단일하다. 기와의 형태는 두껍고 무거우며 구운 온도는 비교적 높다. 대부분 굵은 모래가 섞인 회색 위주이며, 황갈색과 홍갈색도 일정한 수량을 차지한다. 암키와 내면에는 베무늬가 남아 있으며 배면은 민무늬이다. 암키와 가운데 암막새도 출토되었는데, 암막새 드림새 표면에는 압인방격문(壓印方格紋)이 시문되어 있다.
돈화시에서 강동24개석과 동일한 형태의 유적이 3곳이나 더 발견되었는데, 관지(官地)24개석, 해청방(海靑房)24개석, 요전자(腰甸子)24개석이 그것이다. 이밖에도 길림성 도문시·용정시·왕청현, 흑룡강성 영안현, 북한 함경북도 김책시·경성군·어랑군 등 약 15곳에서 동일한 형태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 세워졌던 건축물의 용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발해왕 사후 귀장(歸葬)시 쓰던 임시 제단이라는 설, 발해 왕실의 기념 건축물이라는 설, 민간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라는 설, 거대 신석(神石)을 숭배하던 장소라는 설, 사원 또는 궁전, 관청이라는 설, 역참(驛站)이라 설, 중앙 또는 지방 정부에서 공동으로 관리하는 곡식 창고라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견해들 가운데 발해의 주요 교통로 위에 세워진 역참이라는 설이 많은 연구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