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달구유적은 1941년 동주신(佟柱臣)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당시 2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1948년 9월에는 오풍(吳楓)에 의해 1기의 무덤이 조사되었으며, 1949년 7월 왕아주(王亞洲)는 20기의 돌널무덤〔石棺墓〕을 구제 발굴하였다. 1950년에는 동북고고발굴단(東北考古發掘團)에서 1기의 돌널무덤을 발굴조사하였으며, 1953년에는 왕아주와 동학증(董學增) 등이 4기의 돌널무덤을 다시 발굴조사하였다. 1941년부터 1953년까지 5차례에 걸쳐 모두 28기의 돌널무덤이 발굴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알려진 소달구유적의 내용은 대부분 1949년과 1953년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이밖에도 1983년 5월 길림성박물관과 길림시박물관, 길림대학교에서 이 유적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였다.
소달구촌은 길림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10㎞ 정도 떨어져 있으며, 소달구유적은 소달구 북쪽의 평정산(平頂山) 남쪽 기슭을 따라 동서로 길게 분포하고 있다. 특히 평정산 동쪽의 남사면에 해당하는 대립자(大砬子) 아래로 무덤이 집중되어 있다. 평정산 동쪽의 정상부에는 대형 돌널무덤이 따로 위치하고 있다. 이 돌널무덤의 돌널 크기는 길이 2.5m, 너비 1.5m, 높이 1.5m이며, 그 위에 덮여 있는 뚜껑돌〔蓋石〕은 길이 2.7m, 너비 2.33m, 두께 0.45m이다.
이 유적의 돌널무덤은 모두 괴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그리고 일부 딸린널〔副棺〕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딸린널을 따로 조성하였다. 무덤의 규모는 대체로 길이 1.64∼2.2m, 너비 37∼65㎝, 높이 31∼65㎝이다. 이 가운데 1949년에 조사된 무덤 중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는 M4호를 통해 무덤의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M4호의 돌널은 약 20° 경사의 산비탈에 위치해 있으며 머리쪽은 지표 아래 140㎝, 발쪽은 지표 아래 85㎝ 쯤에 놓여 있다. 무덤 방향은 서쪽으로 약 20° 기울어진 남향이며, 머리방향〔頭向〕은 동북쪽이다. 돌널은 비교적 큰 청석(靑石)을 사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뚜껑돌과 네 벽석, 바닥석, 딸린널로 구성되었다. 뚜껑돌은 3장의 대형 판석으로 덮었는데, 전체 길이는 275㎝, 너비는 103㎝, 두께는 약 26㎝이다. 돌널의 네 벽은 남북 양단에 각각 판석으로 2∼3단씩 쌓아올렸으며, 판석은 암벽 위에 직접 세웠다. 돌널의 내부 길이는 190㎝이며, 북단 너비는 65㎝, 남단 너비는 57㎝, 높이는 50∼60㎝이다. 딸린널은 돌널의 끝에 붙여서 3장의 청석으로 만들었다. 뚜껑돌은 별도로 만들지 않고 돌널의 뚜껑돌로 대신하였다. 딸린널의 크기는 너비 62㎝, 길이 35㎝, 높이 38㎝이다.
무덤의 장식(葬式)은 머리를 약간 옆으로 뉘었고, 상체는 하늘을 향해 바로 눕히고〔正向仰臥〕, 양팔은 가슴부위에서 교차되었다. 다리〔下肢〕는 오른쪽 다리가 약간 구부러져 있었다. 대체적으로 머리만 옆으로 뉘이고 곧게 펴 묻었다〔側首仰身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서단산형의 단지와 바리〔鉢〕등의 토기, 연주식 청동장식〔聯珠狀銅飾〕등의 청동기, 옥도끼, 돌도끼, 돌칼, 돌화살촉, 돌자귀 등의 각종 석기가 있으며, 가락바퀴, 돼지뼈 등도 확인되었다. 평정산 정상부의 대형 돌널무덤에서는 부채도끼〔扇形銅斧〕, 청동손칼, 청동단추장식, 청동화살촉, 가락바퀴, 백석대롱,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소달구유적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서기전 8세기부터 서기전 6세기까지로 편년되고 있다. 이 유적에서 확인된 공반유물이 영길(永吉) 성성초(星星哨)유적보다는 시기가 늦고, 전국시기 연(燕)나라 계통의 유물이 출토된 길림 장사산(長蛇山)유적, 후석산(猴石山)유적보다는 이른 특징이 나타나고 있어서, 대체로 서기전 7세기 정도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