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비 원삼”으로 명명된 홍원삼(紅圓衫)이다. 다홍색 운봉문(雲鳳紋) 비단에 동일한 문양이 직금된 매우 화려한 원삼이다. 오조룡원보(五爪龍圓補) 2쌍 4점이 부착되어 있다. 조형적인 특징으로 보아 20세기 초반의 전형적인 왕실 원삼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윤황후(순종황제비)가 세종대학교(전 수도여자사범대학) 설립자에게 기증한 유물 중 한 점이다. 당시 이를 발표한 손경자 교수의『이조복식고(李朝服飾考)』에는 “병오가례시 원삼”으로 되어 있다. 병오가례는 순종이 황태자 시절 윤씨와의 두 번째 국혼(國婚)인 병오년(1906)에 거행된 가례로서 황태자비 신분으로 착용하였던 유물이다. 그러나 당시 기록인『가례도감의궤』(1906)에는 홍원삼의 기록이 보이지 않아 왕실 기록의 한계점을 보인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2009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 가운데 영친왕비 홍원삼과 색상·문양·재질·형태 모두 동일하다. 1979년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겉감은 다홍색[大紅色]의 봉황운문단(鳳凰雲紋緞)에 동일한 문양이 직금(織金)되어 있으며 안감은 연한 미색의 박쥐수자문단[蝙蝠壽字紋緞]으로 만든 겹원삼이다. 겉감의 어깨와 소매 상단과 하단, 앞길 끝 무릎부위, 뒷길의 중앙과 하단에 각각 원삼과 동일한 문양이 금사(金絲)로 제직되어 있다. 직금의 문양은 아홉 마리의 크고 작은 봉황새가 구름과 함께 제직되어 있는 9봉문 형태이다. 뒷길이 145㎝, 앞길이 130㎝로 뒷길이가 긴 전단후장(前短後長)형으로 진동 끝에서 아래로 2㎝ 내려온 지점부터 양옆이 트여 있다. 양옆 도련선은 직선형이며 소매나비는 매우 넓은 광수(廣袖)이다. 화장은 135㎝, 품 44㎝, 소매나비[수구]는 71.5㎝이다. 소매끝에는 5㎝ 너비의 미색과 남색 색동 2줄을 달고 이어서 20㎝ 너비의 백 한삼이 달렸는데 모두 직금단이다. 겉깃은 직금단을 이용한 배자형깃이며 안깃은 목판깃을 달고 위에 백색 화문단의 동정이 안깃에만 달려 있다. 동정 바로 아래에는 다홍색 단추고리가 달려 있고 반대편에는 단추가 달렸던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새로이 금단추를 달아 놓은 상태이다. 겉감과 안감을 완성하여 함께 끼운 후 도련선은 공그르기로, 배래선은 징궈서 고정해 주었다. 겉감과 안감의 도련마다 남색의 비단으로 선이 둘러져 있으며 안깃 아래와 진동선 위부터 대어주었다. 대(帶)를 고정하기 위한 가느다란 홍색 비단끈이 겨드랑이 사이에 달려 있다.
원삼의 앞·뒤·양쪽 어깨에 발톱이 5개 달린 오조룡보(五爪龍補)가 부착되어 있다. 이 원형의 용보는 원삼과 같은 홍색 비단에 오색견사와 연금사로 용을 중심으로 구름과 바위·물결·산·보문들을 배치하여 화려하게 수를 놓았다. 가슴의 보(補)는 좌측은 길에 고정한 후 다홍색 끈을 달았으며 반대쪽에도 같은 끈을 달아주어 착용 시 매어주게 되어 있다.
윤황후가 세종대학교 설립자에게 기증한 것으로, 조선의 마지막 국혼이었던 병오년 가례 당시 황태자비(皇太子妃) 신분으로 윤비가 착용한 유물이다. 착용자와 착용시기가 밝혀진 왕실 가례복으로서 가치가 높다. 홍원삼의 기록은 병인년(1903) 황귀비(영친왕 생모) 책봉 시 궁중발기[계묘(1903)십일월초칠일 귀비 자가 봉비시 의복발긔] ‘다홍직금구봉원삼 황 한단 내작’으로 확인되며 본 유물과 동일한 소재와 문양·색상으로 나타난다. 9마리의 봉황이 직조된 문양은 순종의 첫 번째 가례인 임오년(1882) 가례 발기[壬午嘉禮時織組件記] 중에도 구봉문 당고의와 대란치마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본 유물의 직물 문양을 왕실에서 “구봉문”이라 명칭되었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