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맹진사댁 경사」에는 결혼 의례 과정이 2막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13의 성사와 진행, 결혼식과 첫날밤이 ‘거짓 계략’과 ‘신부 바꿔치기’라는 극적 상황과 함께 진행된다. 오영진은 대중에게 친숙한 결혼 의례 절차를 극 구조로 사용하면서 ‘거짓말’과 ‘계략’이 서로 맞물리지 않고 어긋나게 함으로써 엉뚱한 상황과 웃음을 유발한다. 이러한 희극성은 1940년대 일본어로 된 시나리오인 「孟進仕邸の慶事」의 창작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오영진은 글을 배우지 못한 조선 대중은 친숙한 소재를 통해 계몽되기 때문에 검열 과정에서 주14은 너그럽게 용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당시 ‘유머’는 오영진에게 조선 영화를 수호하는 방편이었다. 「맹진사댁 경사」가 식민지 조선과 해방 후 한국의 시공간을 거치면서 민족의 주18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유머를 통한 결혼 의례의 시각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맹진사댁 외동딸 갑분이와 정혼하게 된 김판서댁 아들 미언은 자신의 다리가 불구라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소문을 믿은 맹진사는 외동딸 갑분이를 피신시키고 대신 하녀 입분이를 신부로 가장시켜 혼례를 시킨다. 한편 하인 삼돌이는 자신과 입분이의 혼인을 약속했던 맹진사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자 분노한다.
혼례 날에 미언의 훤칠한 외모와 건강한 신체를 본 맹진사는 삼돌이에게 피신시킨 딸 갑분이를 데려오게 하면서 혼례를 미뤄보려 하지만, 아버지 맹 노인의 재촉으로 어쩔 수 없이 혼례를 진행한다. 첫날밤에 입분이는 자신을 하녀라고 미언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미언은 진실한 마음을 얻으려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며 입분에게 용서를 구한다. 뒤늦게 집에 온 갑분이는 아버지 맹 진사를 원망하고, 삼돌이는 맹 진사를 장인이라고 부르면서 극이 끝난다.
1930년대 후반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어문학을 전공했던 오영진은 당시 굿이나 주19, 주20과 인형극에서 주21을 발견하려는 조선 민속학의 영향을 받았다. 오영진은 첫 번째 시나리오 「배뱅이굿」(1942, 『국민문학』)에서 무속을 남성의 영역이자 계승해야 할 전통으로 바꾸고, 놀이성과 연극성을 시각화했다.
1943년에 발표한 시나리오 「孟進仕邸の慶事」 는 「배뱅이굿」 · 「한네의 승천(昇天)」과 더불어 ‘민속 3부작’으로 오영진의 초기 작품 세계를 잘 보여 준다. 당시 1943년은 일제시대 말기로서 ‘민족적 요소가 말살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오영진이 전통적 소재에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은 국가가 없는 시기에도 조선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오영진은 「맹진사댁 경사」에서 주22인 ‘뱀 서방’(구렁 선비)이나 ‘딸 팔아먹은 아비’(처녀매매) 등 대중과 친숙한 민담을 소재로 활용했다.
텍스트의 정전화는 재정의 되거나 재해석되면서 각 시대의 요청에 따라 새롭게 구축된다. 오영진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는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매체 안에서 재탄생되었다. 특히 주23인 일문 시나리오 「孟進仕邸の慶事」를 어떻게 한국 문학의 자산으로 평가할 것인지 연구되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전통 혼례의 장면 묘사에서 우리말에 일본어 외피를 입혔다는 점이 강조되었으며 더불어 희곡 「맹진사댁 경사」에 대한 해석의 깊이가 더해졌다. 「맹진사댁 경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에는 전통 혼례를 통한 신분 이동이라는 희극적 서사,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정치적 의미, 시대별로 각광받는 무대 공연 장르로의 변화 등이 있다.
오영진의 「맹진사댁 경사」 는 시대의 격변기마다 새로운 장르에 적응하면서 「시집가는 날」로 재생산되었다. 88 서울올림픽 경축 전야제, 1995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 개관 공연, 2000년 국립국악원의 ‘경서도 소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 개척 작품으로 공연되었다. 2009년에는 명동 극장 개관 기념을 위해 「맹진사댁 경사」로 공연되었다. 오영진의 「맹진사댁 경사」는 국가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시기마다 조명을 받았다. 성숙한 희극 정신의 바탕 위에서 창조된 「맹진사댁 경사」는 연극사에서 아주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