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
회화
물품
동양에서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되는 문방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먹은 동양에서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되는 문방구이다. 검은색의 고형체로서, 벼루에 물을 붓고 이것으로 갈아서 먹물을 만든다. 이 먹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먹이 성행하였다. 먹은 소나무나 식물유를 태워서 얻은 그을음 가루를 갖풀에 섞어 만든다. 소나무를 태워서 만든 먹이 송연묵, 식물유를 태워서 만든 것이 유연묵이다. 대개 목판 인쇄에는 송연묵을 쓰고 금속활자 인쇄와 서예에는 유연묵을 사용한다. 송연묵은 양덕 지역의 것이, 유연묵은 해주의 것이 유명했다.

정의
동양에서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되는 문방구.
개설

검은색의 고형체로서, 벼루에 물을 붓고 이것으로 갈아서 먹물을 만든다. 이 먹물에 을 담가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이다.

연원 및 변천

먹을 제작한 시초는 분명하지 않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후한(後漢)의 서도가인 위탄(韋誕)이 발명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죽목(竹木)의 첨필(尖筆)에 흑칠을 해서 간독(簡牘)에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위탄이 태어나기 이전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의 등황후전(鄧皇后傳)과 후한의 명제(明帝)가 창수(創修)한 『동관한기(東觀漢記)』에 의하면, 2세기 초인 화제(和帝) 때 각국에서 한나라에 먹을 헌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나라에 대사(大事)가 있을 때면 황제는 황태자나 고관 · 학자에게 먹을 하사하여 은총을 표시했다고 한다.

먹은 전국시대에도 서사용(敍賜用)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춘추(春秋) 제(齊)의 오패(五覇)의 한 사람인 환공(桓公)이 정치 개혁을 위해서 소리(小吏)에 명하여 그의 명령을 필묵을 사용하여 목독(木牘)에 적었다.”는 기록이 『관자(管子)』에 보인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서도 은대(殷代)의 갑골 문자는 먹[墨]이나 적(赤)의 액체를 사용해서 썼다는 것이 실증되고 있다. 그리고 진(晋)나라 무제(武帝) 때에는 먹으로 죽간(竹簡)에 썼으며, 주(周)나라 때의 『죽서기년(竹書紀年)』이라는 책이 묵사(墨寫)되었다는 것이 논증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먹을 사용하였는가를 문헌기록으로 살펴보면, 고구려 때 송연묵을 당나라에 세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철경록(輟耕錄)』에 나타난다. 이로써 삼국시대에 이미 먹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 중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가 발견된 경내의 전실(前室) 정면 상벽(上壁)에 가로세로로 그어진 계선(界線)에 매항 10자 총 81항의 사경체(寫經體) 묵서가 있다.

『묵사(墨史)』 고려조에 의하면, 관서 지방의 맹주(猛州) · 순주(順州) · 평로성(平虜城)에서 생산되었던 먹이 주로 중국에 수출되었다고 한다. 또 그 중에서 맹주묵이 가장 좋았고 순주묵이 그 다음으로 손꼽혔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도 비교적 정품(精品)의 먹이 생산되었다. 양가(楊家)와 무가(武家)의 먹은 모두 송연묵으로서 그 품질이 매우 좋았으며 현재 일본의 쇼소인(正倉院)에 남아 전한다.

고려묵(高麗墨)은 묵광이 번쩍이고 묵향이 코를 쏘는데, 이는 송연을 취재하여 정제한 때문인 듯하다. 조선 정조 때의 대제학 서명응(徐命膺)『고사신서(攷事新書)』에는 다음과 같은 조림매묵법(造林煤墨法)이 자세히 적혀 있다.

“송연 열 근과 아교 네 근, 물 열 근을 배합하여 먹을 만든다. 구체적으로는 물 아홉 근에 아교를 담가 동분(銅盆)에 넣어 녹인 다음 연(煙)이 섞일 때까지 나머지 한 근의 물로써 씻어 별기(別器)에 담아 물을 뿌리면서 수없이 찧어 만들어낸다.”

우리나라 송연묵(숫먹 · 개먹)으로는 양덕(陽德)의 산품이 유명하고, 유연묵(참먹)은 해주의 것이 유명했다. 그리고 한림풍월(翰林風月)을 비롯하여 초룡주장(草龍珠張), 부용당(芙蓉堂), 수양매월(首陽梅月) 등이 상품(上品)이었다. 대개 목판 인쇄에는 송연묵을 썼으며, 금속활자 인쇄서예에는 주로 유연묵을 사용하였다.

구조 및 형태

한대(漢代) 이전의 먹의 형태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한대 이후의 먹은 환형(丸形)이나 편평(扁平)한 형태로서 원주형(圓柱形) · 방주형(方柱形)이었다. 뒤에 와서 여러 가지 모양의 것이 나타났다. 미적 취향에서 그림이나 문자를 장식하기도 했고, 금분(金粉)이나 회구(繪具)로 채색하기도 하였다.

제조 방법

먹의 제조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용기에 기름을 가득 넣고 심(芯)에 점화시켜 태워서 생긴 매연을 긁어모아 고무질 혹은 교질(膠質)을 혼합하여 호상(糊狀)으로 만든 다음 조그만 틀에 부어 굳힌다. 이와 같이 고대에는 그을음[煤]에다 기름을 개어서 만든 일종의 유연묵(油煙墨)을 가지고 인쇄를 하였던 것 같다. 그을음은 불을 사용하여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므로 그을음을 사용하여 먹을 만드는 방법이 예로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유연묵의 제조법은 불을 잘 조절해서 유연을 채취하여 만드는 것인데, 송유(松油), 동유(桐油), 석유(石油) 또는 칠(漆) 등이 사용되었다. 이 중 동유의 사용은 훨씬 뒤의 일이다. 동유를 태워서 그 탄소분(炭素粉)으로 제조한 먹을 ‘동화묵(桐花墨)’ 또는 ‘동매(桐煤)’라고 한다. 이 동매는 질이 견고하고 광택이 난다.

『잠확유서(潛確類書)』에 의하면, “고대에는 칠유(漆油)로 쓰다가 뒤에 모두 석묵(石墨)을 쓰게 되었으며, 한(漢)나라 이후에 와서 송연(松煙)과 동매가 성행하면서부터 석묵은 사라졌다.”고 한다. 송유는 유연을 뽑는 것으로는 가장 많이 사용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먹을 만드는 데 가장 좋은 재료로 인식되고 있다.

송연을 재료로 해서 만든 먹을 송연묵이라 한다. 이 송연묵이 2세기 이전에 이미 사용되었다는 것은 위(魏)나라 무제(武帝)의 셋째 아들인 조식(曹植)의 「악부시(樂府詩)」에서 “먹은 송(松)의 매연으로 만든다.”라고 한 것으로도 증명된다. 이 송연묵은 안후이성(安徽省)에서 생산된 것이 가장 유명했다. 명나라 도종의(陶宗儀)의 『철경록』에 의하면, “당나라 때 고구려에서 송연묵을 세공으로 많이 바쳤다.”고 하였다.

아교[膠]도 제묵의 중요한 성분인데, 보통 사슴의 뿔이나 우피(牛皮), 어피(魚皮) 등에서 정제된다. 이들 원료를 물에 적셔 부드럽게 한 뒤, 삶아서 사(紗)나 목면의 포(布)에 씻어 맑은 액체를 만든다. 아교와 그을음의 배합은 제묵법(製墨法)의 비밀로 되어 있었다.

제묵의 개량법으로는 먹의 농도를 짙게 하기 위해 다시 짙은 홍색 광택이 있는 단사류(丹砂類)를 가공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먹의 방부(防腐)와 묵색의 보존을 위해서 침(梣)의 나무껍질이나 석류의 껍질, 담반(膽礬) 등을 사용하였다. 그 밖에 아교의 취기(臭氣)를 없애기 위해서 사향(麝香)이나 장뇌(樟腦)를 증류하여 얻은 방향(芳香)이 있는 백색 결정체의 향료 또는 박하 등의 향료를 가미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고사신서(攷事新書)』(서명응)
『墨史』(陸友)
『輟耕錄』(陶宗儀)
관련 미디어 (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