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성지(性之), 호는 병산(甁山). 목세칭(睦世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목첨(睦詹)이고, 아버지는 목장흠(睦長欽)이며, 어머니는 남위(南瑋)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유학(幼學)으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5년 검열(檢閱)이 되어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문제로 찬축(竄逐)되어 있던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죄가 없다는 소를 올려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 뒤 봉교(奉敎)·정언(正言)을 지냈으나 앞의 상소문제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계속 받아 체직되었다.
1629년에 예조정랑이 되었으나 대간들의 계속된 탄핵으로 중앙에서 밀려나 죽산현감(竹山縣監)으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치적을 쌓아 1634년 경기암행어사로부터 훌륭한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1638년 다시 부교리를 거쳐 집의(執義)·교리·우승지·동부승지·좌승지·전라감사·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47년 전라감사로 있었을 때 치적을 인정받았던 목성선은 남쪽지방이 불안해지자 경상감사로 제수되어 그곳에 도착한 뒤 곧 죽었다.
목성선이 인성군 이공을 두호한 것은 파당을 초월한 것으로서, 단지 왕의 처사를 올바르게 하기 위한 직언이었다는 것이 인조에게 평가되어, 대간들의 많은 논핵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무난하게 관계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능력과 기량을 갖춘 재능있는 관료라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