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9년 왕비 민씨(閔氏)가 폐위되고 장씨가 왕비가 되었으나,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내려갔다.
이 때 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냈던 편지가 발각되었는데, 그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려는 문구가 있어서 희재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소론인 남구만(南九萬)이 그가 세자의 친척임을 이유로 적극 변호하여 무사하였다.
당시 정국은 장씨 소생인 세자에 대한 지지여부를 쟁점으로 노·소론이 대립하였는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세자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죽은 뒤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자신이 중궁으로 복위하기를 기도한 사실이 발각됨으로써 무고의 옥이 일어났다.
이때도 소론은 세자를 위하여 희빈을 용서할 것을 청하였으나, 결국 왕은 희빈을 자진하도록 하고 희재와 장씨 일파를 국문하여 죽였으며, 남구만·유상운(柳尙運)·최석정(崔錫鼎) 등 소론 대신들을 귀양 또는 파면시켰다. 이 사건으로 소론세력은 약화되는 반면, 노론이 조정에 크게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