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은 불교에 있어 가장 오래된 교리 중 하나이다. 그래서 초기 불교의 문헌 등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이후 대승불교나 동아시아불교에서도 이 무명을 가장 중요한 교리의 한 가지로 여긴다.
특히 부처님이 깨달은 장면을 설하는 『우다나』의 「깨달음의 경」에서도 부처님이 연기법을 깨치며, 이 무명을 첫 번째로 두어 순방향으로 무명에서 시작하여 노사, 다시 역방향으로 노사에서 시작하여 무명, 마지막으로 무명에서 노사, 노사에서 무명의 총 3번의 확인 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불교에서는 이 무명이야말로 모든 번뇌의 시작이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세친주1이 저술한 주2의 5위 75법에서도 무명은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이 첫 번째로 나오는데, 이는 무명으로 인해 인과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미혹함에 빠져 집착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명을 산스크리트어로 'avidyā'로 하지만 'moha'라고도 하여 한자로 우매(愚昧) 또는 치(癡)라고 한다. 그리고 인과와 연기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무지(無知)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무지는 모르는 상태인 것에 비해 무명은 모른다는 그 자체도 또한 모르는 것이기에 보다 근원적인 무지의 상태에 가깝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이기에 탐진치의 어리석은 행동을 거듭 일으키고 그 행동이 원인이 되어 번뇌를 일으켜 유정을 윤회시키게 하는 것이다.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이 무명[avidyā]에 대한 저자인 세친의 대론이 등장하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무엇이 무명[avidyā]인가?, 명[vidyā]이 아닌 것이다”라고 한다.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대답이지만, 그 이유는 무명에 대해 다른 사상이나 용어를 통해 설명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어서 ‘친구’의 예를 들어 “친구[mitra]의 반대 개념은 친구일 수 없는 자이지, 적이 아니다”라고 하여, 한 개념에 대한 이해의 논리를 단순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는 무명이 불교에 있어 가장 초기에 등장하고 있고, 무명을 확인하고 제거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통념이 있어서 그것을 초월적으로 이해하거나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설명인 것이다.
즉, 무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명(明)’을 이해하거나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밝음을 통해 점차 번뇌를 제거하여 주3와 주4를 거쳐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 교학이 점차 발전하고 새로운 불교 운동이 펼쳐지며, 무명은 본래의 의미를 넘어 악의 원천과 같이 이해되거나, 삶의 고통 전체를 가리키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며, 초월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