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은 조직이 미비한 신앙이지만 그래도 일정한 종단 형태의 조직으로 발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것이 무조합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1920년대에 근대적 대규모의 무단조직화(巫團組織化)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동향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고, 전통적으로 무속이 가지는 조직성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지방에 따라서 전통적 무단 조직은 다소 차이가 난다. 북부지방에서는 무당을 사무(師巫)라 하고 그들은 일정한 집회소를 가졌는데, 그 집회소를 사무청(師巫廳)이라고 하였다.
경성(鏡城) 밖의 사무청에는 관의 허가를 얻어 남무들이 무계(巫契)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는 경문을 읽는 독경쟁이가 사무청과 관계를 할 뿐, 사무청에는 세 사람만이 있을 정도로 조직력은 보잘것없는 상태였다.
제주도에는 무당들의 집회소인 신방청(神房廳)이 여러 곳에 있었다. 각 신방청에는 향수(鄕首)가 있고 또 그들을 감독하는 도향수(都鄕首)가 있었다. 그리고 향수를 보좌하는 공원(公員), 회계를 맡는 소임(所任)이 있었다. 도향수 밑에는 그를 보좌하는 도공원이 있었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신청(神廳)이라 하는데, 나주·장흥·우수영·진도·완도 등지에 있었다. 이들 신청에는 남자 무당들로 조직된 무부계(巫夫契)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부들로 조직되어 있다고는 해도 남무들만의 독점적인 집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남부지방의 무당들은 대개 부부가 단위가 되거나 가문 대대로 무업을 세습하는 관계로 볼 때, 남무가 무가(巫家)를 대신하기 때문에 무부계라 하게 된 것 같다.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면 기양리에 있는 신청에는 무단의 취지서·계약문과 선배 등의 성명이 적힌 책자를 봉안하고 매년 삼짇날과 중구에 선생안제(先生案祭)를 지냈다. 장흥군 내 100여 명의 무부들로 조직된 대동계(大同契)라는 이 계의 입회 자격은 20세 이상의 무부이며, 약간의 입회금과 매달 곗돈을 내어 신청유지와 선생안제의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선생안제의 ‘선생’은 무당 선배들의 조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선생안제는 이들에 대한 제사를 말한다. 이 제사에는 무녀들은 참배할 수 없고 남자들만이 유교식으로 4배를 한다는 점에서 무속의례가 아닌 유교제례라는 점이 주목된다.
선생안이라는 것은 조선시대 각 관청에서 전임 관원의 이름·관직명·생년월일·본적 등을 적은 책자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 모방하여 무당들이 선배의 영혼을 모시는 유교식 제사로 발전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그들 자신들이 하층인이기 때문에 제사에서는 상층사회의 제도나 의례를 모방하고자 하였던 의식구조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무부계의 조직에는 계장·공원·장재(掌財)·청직 등의 임원이 있었고, 매년 정월 임원개선이 있었으나 선생안을 제사 지내는 일은 없었다. 다만, 62인의 선생안이 있을 뿐이다. 신청 안에는 또 과중한 세금 부담으로 인한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음을 관청에 진정한 완문(完文: 조선 시대의 부동산에 대한 관아의 증명서)이 보관되어 있다.
나주신청에는 장흥신청과 비슷한 조직이 있고, 해남(海南)에도 신청이 있었다고 하지만 일찍 없어진 것 같다. 이들 남도지방의 신청에는 계조직이 있었고, 대개 선생안제를 지냈다. 경기도에도 무당들의 집회소인 재인청(才人廳)이 있기는 하지만, ‘노량진풍류회’ 등의 조직은 주로 친목과 상부상조의 목적이 있었을 뿐 제사를 공동으로 행하는 것과 같은 조직 활동은 없었다.
이러한 전통적 무당 조직은 근대화의 물결과 더불어 새로운 무당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숭신인조합(崇神人組合)이다. 이 조합은 1920년 5월에 결성되어 1926년까지 존속한 전국적 무당들의 단체였다. 김재현(金在賢)이 결성하여 관의 허가를 얻어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각지에는 지부를 두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있었다.
이 조합의 취지문과 규약에는 오랜 전통이 있는 민간신앙의 신앙적 가치를 재인식시키고, 또 그로 인하여 생긴 많은 폐습을 시정하여 조직화와 함께 참신하게 하고자 하였다. 즉, 조합의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조합에서 무당 등을 통제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이러한 무당의 보호와 동시에 폐습의 개정 등을 내세우고 관의 허가 하에서 실시된 조합 활동은 대세를 얻어 활성화되었으나, 나중에는 조합 임원들의 부진한 운영으로 무당들의 돈만 뜯는 인상으로 변하고, 불화로 인한 경찰의 수사 등으로 인하여 결국 본부가 폐쇄되고 말았다.
그 뒤 이를 대신하려는 군소 단체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숭신회(崇神會)·영신회(靈神會)·숭신교회(崇神敎會)·숭신협회(崇神協會)·숭신자치회(崇神自治會)·신도창복회(神道昌復會)·신도교단(神道敎團)·성화교회(聖化敎會) 등이 생겨났다가 없어지고는 하였는데 어느 것이나 숭신인조합 만큼의 세력을 펴보지는 못하였다.
이들 중 숭신회와 영신회가 각각 월보를 발행하는 등 교세를 진작하려 하였으나 창간호를 마지막으로 하였고, 다른 단체들은 계획 중에 유산되고는 하였다.
각 단체들은 미신이라는 열등의식을 벗어나고자 폐습을 타파하며 새로운 종교단체를 표명하고 초지역적 조직을 시도하였으나 회원 자신들의 의식수준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무당들은 회비 등 경제적 부담을 느껴서인지 점차 참가 의식이 희박해짐으로써 조직은 약화되어 결국 유명무실해졌다.
그밖에 1960년대에 동도교회(東道敎會) 등이 있었으나, 이들 단체가 회비를 거두기 위한 단체라는 것 이상의 긍정적 태도를 가진 회원은 극히 소수였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무조직으로는 1950년대 말에 경신회(敬信會)라는 이름으로 발족한 대한승공경신연합회(大韓勝共敬信聯合會)가 있는데, 기관지로 『한국민속신문』을 격주간으로 간행하고 있으며, 매년 전국무속예술경연대회를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