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4.26m. 석탑은 깊은 산골짜기 안의 넓은 평지에 있다. 주변에서 금동불상이 발견된 일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그 외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아 사역(寺域)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절의 이름도 알 수 없다. 이전에 무너졌던 것을 1960년 9월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다.
석탑은 단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단층 받침돌은 이 지역에서 발견된 석탑과 양식을 같이 한다. 바닥돌은 크기가 다른 4장의 널돌로 구성되었는데, 받침돌의 면석을 받치는 굄은 생략되었다. 받침돌의 면석은 4장의 널돌로 조립되었다.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을 새긴 남쪽면과 북쪽면의 널돌 사이에 가운데 기둥만을 조각한 동쪽면과 서쪽면의 널돌을 끼운 모습이다. 4장의 돌로 만든 덮개돌에는 밑면에 쇠시리인 부연(副椽)을 나타내었지만, 윗면 가운데 부분에는 몸돌을 받치는 굄 장식이 생략되었다.
탑신부(塔身部)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고, 지붕돌에는 받침이 4단으로 간략화하였다. 석탑을 복원할 때, 1층 몸돌에서 한 변이 22㎝이고 깊이가 13㎝인 네모난 사리공(舍利孔)이 확인되었지만, 그 안에 봉안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되었다고 한다. 지붕돌 추녀의 밑은 직선이고, 낙수면은 반전(反轉)이 매우 느리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3층 지붕돌 윗면에 네모난 노반(露盤)을 조각하여 만들었는데, 나머지 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다만, 노반의 윗면에는 지름 15㎝, 깊이 18㎝의 찰주(擦柱) 구멍이 있어서 머리장식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다.
이 석탑은 받침 부분의 구성이 변화하였고, 덮개돌의 굄 장식이 생략되는 등 전형적인 신라 석탑과는 시대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3층 지붕돌에 붙여서 제작된 노반의 구조는 고려 석탑과 연결될 소지를 지니고 있다. 곧 이 석탑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 지방의 특색을 보여주는 석탑으로, 조성 시기는 신라 하대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