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숙재(叔裁)·분중(賁仲), 호는 옥동(玉洞). 합천(陜川) 출신. 문장수(文長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과(司果) 문유지(文有智)이고, 아버지는 생원 문옹(文滃)이며, 어머니는 함안조씨(咸安趙氏)로 판결사(判決事) 조적(趙績)의 딸이다.
조식(曺植)·주세붕(周世鵬)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황(李滉)으로부터 『대학(大學)』의 요지를 배웠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어 1566년 홍원현감으로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저작을 지내고 1573년(선조 6) 평양서윤으로 나갔다.
의정부에서 업무처리가 소홀하다고 상계(上啓)하여 양양부사로 체직되었다. 1580년 나주목사로 재임 중 양양부사로 있을 때 환곡(還穀) 5,700여 석을 횡령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뒤에 다시 등용되어 사간원헌납을 지냈다. 뒤에 도승지 겸 직제학을 추증받았다. 경상남도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옥동집(玉洞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