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여중(汝中). 문익점(文益漸)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익형(文益亨)이며, 아버지는 문면(文勉)이다.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다.
1593년 정언(正言), 다음 해 지평(持平),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역임하고 홍문록(弘文錄)에 피선되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지냈다. 이어 장령(掌令)을 여러 차례 지내고, 평안도에 어사로 파견되었으며, 수원부사·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에 이르렀다.
정언이 된 뒤 정인홍의 일파가 되어 북인(北人)으로 행세하였다. 이 당시 사간 김신국(金藎國), 헌납(獻納) 이이첨(李爾瞻), 정언 박승업(朴承業) 등과 함께 계(啓)를 올려, 송화현감(松禾縣監) 이귀(李貴)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박대수(朴大秀)의 부정을 들어 탄핵하여 체직시켰다.
좌승지 민몽룡(閔夢龍), 양주목사 허흔(許昕) 등도 파직시켰다. 특히, 남인의 영수였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강화를 주창하였다고 하여 탄핵, 체직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때는 정인홍 등과 함께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유성룡이 밀려난 뒤 북인이 일시 정권을 장악함에 그 역시 득세할 수 있었으나, 곧 유성룡 탄핵 사건 때문에 크게 현달하지 못하고 광해군 때는 아들의 불륜행위 때문에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