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지방유림의 공의로 현유(賢儒)의 위패를 모셔 그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의 학문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568년(선조 1) 문묘 인근에 서당을 건립하여 사림의 장수처(藏修處)로 삼고, 사액을 청하여 선조가 직접 ‘文會書院(문회서원)’편액을 써서 내려주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어서 이후 중건하였다. 1606년(선조 39) 재사액을 요청하여 당시 사신으로 와있던 명나라 서도가 주지번(朱之蕃)이 쓴 편액을 받았다.
1680년(숙종 6)박세채(朴世采)가 송시열(宋時烈)과 상의하여 주자(朱子)의 남강현학규(南康縣學規)를 본떠 서원을 동서의 양사(兩祠)로 조성하고, 이 고을 출신으로서 학덕이 높았던 안당(安瑭)·신응시(辛應時)·오억령(吳億齡)·김덕함(金德諴)을 동사(東祠)에, 그리고 이 고을과 관련이 있는 국가적 명현 이이(李珥)·성혼(成渾)·조헌(趙憲)을 서사(西祠)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그 뒤 1696년(숙종 22) 지방 유림이 박세채를 서사에 추배하고 이듬해 중액(重額)을 받았다. 당시의 경내건물로는 동사·서사·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전사청(典祀廳) 등이 있었으며, 강당 옆에는 선조·숙종의 어필과 주지번의 글을 각석하여 세운 비각이 있었다.
동사와 서사에는 각각 안당·신응시·오억령·김덕함과 이이·성혼·조헌·박세채 등 4명씩의 위패를 봉안하고 봄·가을 향사를 지내왔다. 이 서원은 당시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과 함께 황해도의 학술진흥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8년(고종 5) 이후 실시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50년대 이후의 사항은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