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는 전하지 않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 내력만이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물계자는 포상(浦上) 싸움과 갈화(竭火) 싸움에서 군공(軍功)이 컸으나 포상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아내에게 “내 듣건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함을 보고는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만나서는 몸을 잊고 절의(節義)를 지켜 사생을 돌보지 않음을 충이라 하는데, 무릇 보라(保羅)·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국난이요 임금의 위태함이었으나, 나는 일찍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친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은 불충이 심함이요,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누(累)를 아버지에게 끼쳤으니 어찌 효라고 하겠는가. 이미 충효를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과 시정(市井)에 설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메고 사체산(師彘山)에 들어가서 대나무의 곧은 성벽(性癖)을 슬퍼하여 그것에 기탁(寄托)하여 노래를 짓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비겨서 거문고를 타서 곡조를 지으며 숨어 살고,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물계자가」는 개인적·서정적인 내용으로 지어진 금곡(琴曲)의 가악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 초기 부족연맹국가시대에 개인 작가(作歌)의 기록으로는 이 노래가 처음 보이는 것이므로, 신라의 시가문학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노래라 하겠다.
어떤 학자는 이 노래에 이르러 신라 초기의 종합예술 형태인 가무악(歌舞樂)이 비로소 가악과 무용으로 분화되기 시작한 것이라 논급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