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사(大乘寺)와 10리의 간격을 두고 산의 서남쪽에 있었으며, 사불산(四佛山) 백련사(白蓮社)라고도 한다. 신라 시대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미면사라 한 것은 의상이 용녀(龍女)의 시중을 받으며 불경을 강할 때 뜰의 좌우에 있는 두 곳의 우물 중 한 곳에서는 쌀이 나오고, 다른 곳에서는 밀가루가 나와 아무리 많은 대중이 공양해도 줄어들지 않았다고 하여 지어진 것이다. 백련사라 불린 것은 원효(元曉)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법화경(法華經)』을 강할 때 땅에서 연꽃이 피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창건 당시의 미면정(米麵井)과 의상의 종립(鬃笠)·석장(錫杖)·설법대(說法臺)는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 1241년(고종 28) 소경(少卿) 최자(崔滋)가 상주목(尙州牧)에 들렀다가 이 절의 유래를 듣고 기이하게 여겨 찾아가 보니, 옛 전당(殿堂)에는 원효·의상의 진상(眞像)이 먼지투성이로 남아 있었으나, 의상의 종립과 석장은 오히려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금호석(禁虎石)·냉천정(冷泉亭)·백련사 현판 등을 보고, 법조왕공(法曹王公)을 독려하여 중창을 시작하였다.
1243년(고종 30) 불우(佛宇)·조당(祖堂)·승료(僧寮)·객실(客室)·허백루(虛白樓)·냉천정 아래의 신청교(神淸橋) 등 60여 칸을 완성하고, 조계산인(曹溪山人) 탁연(卓然)을 청하여 각 건물의 액제(額題)와 동백련사(東白蓮社)라는 사호(寺號)를 쓰게 하여 호남의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와 구별하게 하였다.
1244년(고종 31) 최자의 품신으로 이 절의 주맹법사(主盟法師)가 된 천책(天頙)은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를 짓는 한편, 법화도량(法華道場)을 개설하고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조직하여 염불삼매(念佛三昧)를 권장함에 따라 만덕산 백련사와 함께 천태종의 중심 수행처가 되었다. 그 뒤 권문세가의 장지(葬地)로 잠식되어 소수의 탁발승만이 살았으며, 지금은 옛 자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