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상지(尙之), 호는 우천(牛川). 할아버지는 민구(閔球)이고, 아버지는 승지 민세량(閔世良)이다.
1568년(선조 1)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고, 158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발탁되었다.
그 뒤 성균관전적에 올랐고, 이어 공조·형조·호조·예조의 좌랑·정랑을 역임하였으며, 사헌부로 자리를 옮겨 지평(持平)으로서 관기확립에 힘썼다. 이어 외직으로 옮겨 숙천부사(肅川府使)·서흥부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의 피해를 수습하였으며, 1597년 사옹원정(司饔院正)이 되어 궁중의 양식을 주관하였다.
이때는 아직도 임진왜란으로 명나라 군대가 진주하고 있던 터여서 접반관으로서 명군의 군량조달도 함께 맡고 있었는데, 임의로 사무를 처리하였다고 하여 사헌부에 의하여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01년 형조참의로 다시 서용되고, 이어 승정원으로 옮겨 동부승지·좌부승지·좌승지를 역임하였다.
이때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최영경(崔永慶)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좌천, 수안군수에 보임되었다. 이때 연배가 60여세였는데 어느날 우연히 세상을 한탄하고 벼슬을 단념, 7년 동안 칩거하다가 죽었다. 성품이 고졸하고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이(李珥)와 교우가 깊었으며, 노년에 이르기까지 교제가 끊이지 않았다.